1. 참으로 지독한 더위다. 이런 기록적인 불볕더위와 폭우는 소위 이상 기상 현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코로나 19 시국이 괜히 생겼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차별 착취로 실재의 도래를 목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 삶이 조금 나아지면서는 그나마 집 앞에 있던 동산마저도 공원화니, 아파트 단지 개발이라느니 하는 이름 아래 사라졌다. 그나마 공원이라면, 가능한 한 기존에 서 있던 나무들은 살렸다. 그러나 콘크리트 인공 숲으로 변한 자연은, 비바람을 막아주던 일을 더 이상은 수행하지 못한다. 제 길을 잃은 물 흐름은 자연에서 주어진 길을 이탈해 인공이 만든 길을 따른다. 그러다가 자연에 부딪히던 물살은 마침내 인간을 향해 덮쳐 버린다. 이것이 상징계를 구성해 살고 있는 인간 세계에 대한 사건이며, 실재의 침입이라고 말한들 현실을 설명하지 못할건 없다. 과한 해석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나는 이 ̒작은 빛을 따라서'라는 작품에서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읽기 나름이겠지만, ‘작은 빛'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에 있음을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대하게 되었다.
2. 사건의 도래
"기존의 견고한 동일성의 틀을 부숴버리는 가장 강력한 힘이 사건”[알랭 바디우의 사건. 사랑, 우연성, DASEIN, 논.하여 술.하다, 문검, 네이버 블로그]
은동의 가족은 필성 슈퍼라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게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 인근에다가, 다수가 거주하는 아파트 입구에 위치해 비교적 탄탄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그녀의 고모는 이미 한 몫 챙겨 서울로 이사하면서 은동이네 가족에게 이를 인계하고 떠났다. 은동이네 가족에게도 이런 꿈은 견고한 현실이며 꿈이다. 그러나 엉터리 마트라는 강자가 출현함으로써 현실은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은동은 필성 슈퍼 둘째 딸이면서 연극배우가 꿈이지만, 그것이 위협받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현실의 단단한 고체가 흘러내리는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섬에서 나왔더니만 육지는 온통 글자 세상이야.”
은동이 할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지만, 어느 날 집으로 방문한 목사 일행 앞에서 읽어야 하는 기도문을, 시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은동에게 대신 맡긴다. 여태껏 감춰져 있던 할머니의 문맹이 들켜 버리는 사건이었다. 이들 가족이 여태껏 필성 슈퍼를 운영하며 안정적 삶을 살던 섬은 은동 가족만의 세계이다. 그러나 엉터리 마트, 할머니의 문맹 노출을 통해 사건이 도래함으로써, 실재를 맞이할 것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진열만 하면 수익이 보장되고, 글자를 몰라도 아무 지장이 없던 일상에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여기에 대한 현실의 저항은 소량, 소액도 배달하거나 절인 배추판매 등 필성 슈퍼의 몸부림 속에서 상징된다. 할머니 측면으로 보면, 손녀에게 글자를 배우는 대가로 본인은 의도를 모르는 연극 아카데미 수업료를 지원하게 된다. 그것으로 현실을 자각하는 그들의 몸부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은동은 "학교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면 나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다”라는 표현에서도 보듯이, 상징계를 탈출해 실재를 맞을 꿈을 꾸고 있다. 할머니의 문맹 탈출도 동시에 그 점을 상징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3. 꿈, 실재를 찾는 일
"우리의 지각작용에 나타나는 현상과는 달리 사물 그 자체를 실재라고도 하고(Kant), 우리가 경험하는 바의 내용 그것을 실재라고도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오은동은 현실이라는 상징계를, 연극이라는 빛을 따라가면서 탈피하고자 한다.
연극처럼 자신의 세계를 무대에 올리는 게 꿈인 것이다
"이 고장은 너무 심심했고 뻔한 것을 요구했다. 뻔한 이유로 누군가는 학이, 누군가는 닭이 되어 버리는 세계. 이곳에 있다가는 수많은 닭 중 하나가 되고 소리만 내다가 죽어버릴 것만 같다.”
이것은 현실이라는 한계를 넘어 실재를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라는 자기 증강 과정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은동에게 일종의 진실을 대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녀에겐 친구 석희가 있다. 석희의 아버지는 각설이지만 그녀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은동이 물건을 배달하는 아버지 모습을 외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서는 석희를 통해 일반의 기대(부잣집 딸 등)를 허물어뜨리며 현실의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은동 자신도 담임의 공무원, 특히 여자의 경우엔 교사가 안정적이라는 권고 대신 자신만의 꿈을 키움으로써 진실에 복귀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주기는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면, 유상렬 교사의 교육 정상화 주장, 특별반 폐지 주장, 은동 아빠의 반(anti)엉터리 마트 시위는 ,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엉터리 세상이라는 실재의 폭로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서은 할머니는 기성질서의 틈을 뚫고 그간 숨어 있던 실재를 보는 역할을 한다.‘서운'이 아닌 자신의 본명 ‘서은', 세상의 글자 해독 등 자신의 세계를 찾는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징계의 약속은 내용을 숨겨놓은 외피이므로 실재를 통해 볼 수 있어야만 진실한 것이다.
"님이가 니미가 되지 않게”
상징계에서 우리가 한 약속에서는 진실이 감춰져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한편, 석희는 장학금 등 기성질서에 볼모로 잡힌 애로서 아버지의 기대와 학교에 대한 의무감으로 연극 공연이라는 꿈을 포기하게 되지만, 결국엔 진실한 것을 찾아 떠날 것이 예고된 존재이다. 은동 아버지의 위도 장사도 이 상징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제스처의 일환이기도 한 것이다.
4. 진리 찾기
엉터리 마트는 실재 침입의 단면을 보이고는 일시 사라지지만 불완전한 도래를 보인 것으로, 더 큰 외국계 마트 침입의 본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그로 인해 위도로 영역을 옮긴 아버지는 새로운 세계를 찾는 모습이다. 여기서, 위도 출입 선박이 조난되어 아버지가 익사 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뻔 한다. 다행스러운 그의 무사 귀환은 진실을 향한 아버지의 분투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인터뷰를 곡해한 방송으로 누군가의 부조금을 받게 된다. 이는 거짓의 상징적 유혹인 것이다. 이로 인해 은동의 가족은 갈등하게 되지만, 난파선 유족에 기부함으로써 진실을 지켜낸다. 더불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는 생사를 넘나드는 아버지의 각고!
이런 아버지에게서 은동은 죽음 충동을 보고 있다. 꿈은 죽어도 좋다는 죽음 충동이 있을 때 숭고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넘어진 데로 가서 그 자리에서 뭔가를 수습하고 싶었다”라든지, "연기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잖아요?”라고 말하고 있다. 또는 쌤 마트로 가서 할머니와 함께 거짓된 실체와의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폐허 오은동이 일어선다. 필성 슈퍼는 반건조 갑오징어와 맥주 판매로 또 한번의 회생 기회를 가졌지만 그마저 폐업하고 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서은 할머니의 샘골 여성 문예 금상 수상은 알아야 면장질, 담장을 면하는 것을 실현한다. 자신을 감금하는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진실은 언제든 상징의 틈을 뚫고 도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망한 적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