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
변증법적 근대는 모순을 지양해 더 높은 정신이 구현되는 세계를 추구해 왔다. 말하자면 동일성이라는 이념 하에 차이를 삭제해 왔다. 서로 충돌하고 마주 보는 것은 운동의 계기가 되기는 하지만, 결국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르다'라는 것은 세계에 포함되어 있지만, 결국엔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데 질서정연한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폭력을 낳는다.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 등 성 소수자, 빈자, 인간종이 아닌 다른 종 등은 모두 그 반대편이 포섭하지만 또한 타자로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배려',‘관용'이라는 말에서조차 다수자, 강한 자 중심의 시각이 녹아 있는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는 이런 이분법적 사유에 익숙해 있다. 남자와 여자, 인간과 비인간, 옳고 그름 등.
그런데 거기에는 어느 쪽에도 포함되면서 또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트랜스 젠더처럼 기성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비식별 영역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남녀라는 기존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젠더는 생래적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 수행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종래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들뢰즈도 다양체를 내세우며 동일성에 의해 지워져야 하는 차이에 대해 파시즘 같은 생각이라며 반기를 든다.
차이를 없애고 종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차이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 같은 경우에도 사랑 예찬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편다.
‘사랑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나 각자로 남는 것'이라고. ‘우리'라는 모호한 폭력적 통합을 간파한,‘차이 자체'를 존중하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는 고정성보다는 다양성이 훨씬 중요한 사회이다. 우리는 다수가 만나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 속에서 다종, 다기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서로의 교감을 위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것은 타자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마주 서는 타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 자연, 심지어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타자는 그냥 마주 서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하나의 세계'로 그러한다. 하지만 특히 인간은 세계를 도구나 사물처럼 취급해 왔다. 그러다 보니 비인간인 타자, 정상적이지 않게 보이는 상대에게는 인간, 그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억압을 해왔다. 이성 만능주의에 따라 자연은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 마구잡이로 훼손해 왔다. 다른 종의 동물에 대해서도 이성이 없는 종이라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다. 심지어 같은 인간종 내에서도 소수자는 비정상이라고 칭하며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이성의 극치가 행사되던 시대에도 서로 간 전쟁을 통한 파괴를 자행했으며, 대학살, 인종 청소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 기껏 반성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래서 세계와 관계 맺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이성으로서는 힘들어 보인다. 2019년, 전 세계적인 코로나 시국이 전개된 것만 해도 그렇다. 이를 두고 '실재의 귀환'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이 진보라는 미명하에 아마존 밀림 같은 지구의 허파를 도려냈다. 가만히 잘 숨 쉬던 지구는 호흡이 가빠졌다. 자연이 품고 있던 각종 병원체도 숙주를 잃었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동식물로부터 인간으로 그 서식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세계‘내’만 그랬을 뿐, 세계‘와’의 관계를 목격한 건 아니다. 뉴욕 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져 바닥을 보인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실체, 실재의 도래를 보여 준 것은 아니다. 단지 세계‘내’나쁜 이웃의 나쁜 관계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이슬람 근본주의’,‘테러’같은 말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다 세계의 일원인 것이지 사람, 그것도 특정 집단만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최근의 어느 외국 사례에서는, 반려동물에게도 유산을 상속하는 사례가 있었다. 가족 개념이 확대된 것처럼 보이는 사태이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월적 구분 짓기의 색다른 현상이라는 비아냥을 떠나 그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비록 인간의 관점일지라도 그것은 한 개체를 세계로 받아들이는 관점이다. 더욱이 다양성이 수적 다수, 차이의 존중이라는 물리적, 추상적 구호보다는 진정한 관계라면 어떤 실천이 따라야 하는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이는 새로운 발전 모델을 주장하기도 한다. 바로‘발전을 멈추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진보를 믿어왔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지구 온난화'는 그동안 환경 보호론자들이 꾸며 낸 음모라든지 하는 쑥덕거림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건 쓸데없는 논쟁이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불볕더위에 쓰러질 일상이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날마다 겪는 일에 더 이상의 공론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전 세계는 뒤늦게 온실가스 감축 방법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중 자동차 동력으로 사용되는 연료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여태껏은 화석연료가 대기를 오염시키며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앞다투어 전기차, 수소가스차 등으로 대기오염을 줄일 대안을 개발해 왔다. 그런데 전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설혹 화석연료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 경우라도,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풍력 발전 등은 또 다른 환경 파괴를 예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앞만 보고 가는 데 익숙하다. 그러면 이제부터라도‘멈추어 서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직선적 진행에서 한 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 인간의 편의를 내려놓는 것이다.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은 없애면 된다. 여기에는 물론 소비주의 횡포가 작동할 것이다. 뜻은 다르지만, 끊임없이‘차이'를 생산해 욕망을 창출해 내는 것이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이를 없애는 것의 폭력성을 말하는 것이면 그 단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기보다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배려, 양보 같은 관념을 말한다고 하면, 이런 실천적인 측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 문제이다. 개별 체를 고유한 세계로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다가 인식의 지평을 넘어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는 인식 자체가 우선 중요하다.
어차피 행위 주체는 인간이지만, 그래서 아직도 세계와 공생한다는 고자세의‘자리'에서, 세계에 반성하는 낮은 자세가 긴요하다.
여기서는 전통적 공동체 개념의 ‘우리’가 아니라 마주 선‘나와 너'와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