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어와 도다리는 속칭 좌광우도로 구분한다. 눈이 왼쪽으로 쏠리면 광어, 오른쪽으로 그러하면 도다리라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일 때고, 돌연변이 광어는 오른쪽으로 눈이 쏠려 그 구별이 무색해지는 예도 있다. 광어는 넙칫과로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고 수심 10~200m 사이 모래 바닥에 산다. 몸길이는 보통 40~60cm, 체중은 1~3kg, 황갈색 바탕에 흰 점과 검은 점이 빼곡하다. 도다리는 가자밋과, 이빨이 없고 수심이 조금 깊은 곳의 모래. 개펄에 산다. 황갈색 바탕에 암갈색 무늬를 갖는다. 몸길이는 보통 30cm 정도이다. 양식이 안 되어 거의 자연산이다.
이 구분은 바닷가 회를 파는 아낙네도 힘들어, 양식산 광어를 도다리라고, 특정 가자미를 자연산 광어라 우기기도 한다" [나무위키,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1. 차별 혹은 차이, 뼈와 살을 드러내는.
나는 광어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겠지만, 나는 나대로, 도다리는 그 나름으로 서로 억울하다. 우린 누구처럼 눈이 크고 초롱초롱해, 예쁘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몸은 날렵한 유선형으로 뻗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어 멋들어진 자태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비늘이며, 물결을 부드럽게 가르는 날렵한 지느러미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마시길.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툭 튀어나온 못생긴 눈과 본때 없는 납작한 몸통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두고 왼쪽에 쏠리면 광어라고, 오른쪽에 붙으면 도다리라고 부른다. 그것도 모자라면 2자 붙여서‘왼쪽 광어’, 3자씩 일컬어‘오른쪽 도다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우릴 구별해 보라!
눈이 어디에 붙었냐고?
내 친구는 돌연변이라서 오른쪽에 눈이 붙은 광어인데도 저쪽 종족 도다리라 오해받고 산다. 심지어 나는 자연산임에도, 양식장 출신 친구가 나를 사칭하는 일에 동원된다. 도다리와 혼동되는 것도 정신 사나운데, 출신지로도 헷갈리게 만든다. 물론 사는 곳이 얇은 그물 하나 사이로,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있으면 양식, 밖에 있으면 자연산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실지로 양식 그물에 갇혀 살다가 어찌어찌해서 운 좋게 탈출한 몇몇은 자연산이라는 승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림없다. 같은 종족이지만 그들과는 피부색, 먹는 것 등이 대략 달라서 우리도 그들을 동족이라 하기는 뭣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점에서는 자연에서만 살 수 있는 도다리들에게 한 수 꿀리는 건 사실이다. 암튼, 사람들은 이번에는 나와 도다리를 벌거벗겨 놓고 ‘약한 선분홍색’‘옅은 주황색’…. 하며 서로 구분하려 들지만, 여전히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간 내 살을 발라낸 뼈는 통째로 매운탕으로 들어갔으니, 이 또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도다리는 어느 것이고, 광어는 어떤 것인가를 구분할까?
뼈째로 살째로 모두 해체하고서도 말이다.
2. 억압, 뼈와 살을 감추는
방어처럼 강한 힘으로 수족관을 부술 듯한 분노를 못 이겨 거친 물살을 일으키는가?
감성돔처럼 용왕이 내렸다는 둥 하며, 먼바다나 나가야 기껏 한두 마리 낚여주는 그 잘난 고기인가?
미려하기도, 힘이 세기도 한 그들에 비해서는 그저 먹이를 훑느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편편하다 못해 종잇장 같은 몸을 낮추고 또 낮추며, 그것도 보일까 봐 모래며 개펄에 몸을 묻고 보호색으로 덮고 지냈다. 자연히 뼈마디가 굵고 수직으로, 적을 위협하듯 몸통을 3차원 구조로 만들지는 못했다. 다른 종들이 수중으로, 수면 가까이로도 우아하게 부상할 때, 제 서식처를 벗어나 상승할 꿈은 꿔 본 적도 없다. 나와 내 어설프게 닮은꼴 도다리는 그저 바짝 엎드려야만 한다. 그놈의 육중한 수압은 우리를 더 평면처럼 만들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몸과 뼈는 더 수축해야만 한다. 심해 상어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을 내주지 않도록 냅다 땅바닥과 한 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먹고 살 일 같으면,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조개를 포획하기 위해서라도 그보다는 더 몸을 낮게 숙여 겸손하게 예의를 표시해야만 한다.
미안하고 한편으론 고맙다고…….
3. 폭력, 뼈와 살을 부수는
그렇게 겸허하고도 예의 바르게 살았건만, 우리는 그만 사람들의 어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유혹하는 미끼를 외면하고 분수를 지켰건만, 사나운 저인망, 바닥을 훑는 낚시 바늘은 우리 몸을 꿰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이란 게 저런 가 보다. 우린 처음으로, 또는 어쩌면 끝을 맞이할 수도 있는 그 창공을 쳐다 보고 있다. 왼쪽에서는 구름이 잔뜩 몰려 오고 있는 데, 도다리 녀석은 저게 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다른 자랑질을 해 대겠지!
“봐라! 오른쪽 하늘에는 상어처럼 생긴 녀석이 뒤꽁무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고 있다고.”
우리는 고기잡이배의 임시 저장고에서 어느 수조 차로 옮겨 다시 하루를 꼬박 달렸다. 지친 몸을 추스르고 간신히 올려다보니, 어느 횟집 수족관이란 곳으로 우리 몸뚱이가 던져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든 이 아쿠아리움은 꽤 아늑하다. 단 1초도 쉴 새 없이 산소 발생기가 뽀글거리고, 수족관을 관리하는 주인은 규칙적으로 먹이를 준다. 게다가 혼자 심심하지 않게 가리비랑 다른 친구들도 함께 넣어 준다. 집에서 살 때는 귀찮아서 청소 한 번 안 해 봤는데, 여기서는 한 번씩 새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고 물도 갈아준다.
“얼마나 이 안락함이 계속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옆에 있던 다른 동료들이 하나씩 집을 떠났다가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아진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잠시 갔다 오겠다던 친구는 어딘가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한 날들이 연속되다가, 어느 날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광어하고요. 다 끝나면 매운탕 5인분으로….”
사람들에게 먹기 좋게 내 몸은 뼈와 살로 나뉜다. 혹자는 뼈째로 먹는 것도 좋다고 잔뼈가 섞여 있는 채로 우리 몸을 분해한다.
광어다 도다리다 서로 편을 나눠 우리끼리 구별해 봐야,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어차피 저들은 우리끼리 구분하는 것만큼 차이를 알 필요도 없다. 그저 납작하게 생긴 못생긴 고기들일 뿐이다. 눈이 왼쪽. 오른쪽에 붙었든, 양식장을 탈출한 녀석이든 자연산이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도 고맙긴 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한때 우리가 놀던 바닷가를 본 떠, 해초같이 생긴 무채를 깔고, 그 위로 인간이 띄운 배, 장식용 꽃을 얹었다. 비가 오면 어딜 가릴 것이라고 아주 조그만 우산도 펼쳐 놓는다.
우리 머리가 함께 전시될 때는, 그래도 부릅뜬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던지, 가만히 깻잎으로 가려주기도 한다. 그들의 알코올기 섞인 소란은 몇 차례의 술병 주문이 반복되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마침내 광어와 도다리 구분에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은 마무리로 우리의 머리와 꼬리 끝까지 이어진 뼈를 끓인다. 미처 발라지지 않은 아주 작은 살점도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간다. 보잘것없는 몸의 가장 적나라한 부분마저 노출되고,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할 육지 친구들과 몸을 눕힌다. 살이 없어 뼈는 빠르게 물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고단한 몸이 녹아내린다. 그간 수중 몇십 미터, 몇백 미터 아래에서도 버텨왔는데, 처음 대하는 이 온탕에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마지막 남은 부분마저 다 녹아내린다.
4. 회피, 뼈의 문제를 살로 바꾸는
내 친구 광어는 집안 내력이 가자미목 넙치과 넙치 속 넙치 종이다. 나는 가자미목 가자밋과 도다리 속 도다리 종이다. 증조할아버지가 같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우린 할아버지 때부터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고, 지금은 서로 이름도 다르다. 서로 다른 곳을 보게 되어서 그럴까?
눈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족보를 자세히 따져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한때 우린 같은 곳을 쳐다보고 같은 살과 뼈를 가졌을 것이다. 모양새가 달라지긴 했지만 납작한 몸과 1차원적으로 뻗은 뼈 모양을 가진 걸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도 반목하듯이 눈이 돌아간 것은 필시 무슨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살 속에는 옅은 색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눈의 모양과 몸의 안팎에서의 색깔로 우리를 구분하려는 것은 뼈의 문제를 살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세히 나뉘는 건 아니다. 뼈회라는 이름으로 살과 섞이는 횟감이 살과 뼈를 나누지 않을 때, 우리는 동질감을 느낀다. 수족관에 갇혀서 서로 이야기를 할 때도 우린 같은 곳을 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몸을 낮추는 것은 같다.
살로 우리를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린 같은 뼈를 가졌으며, 그 주위에 달라붙은 몸은 외형일 뿐이다.
5. 뼈와 살의 탈출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컴컴하고도 바닥만 보이는 곳에서 살까?
고래는 하늘이 보이는 수면을 가까이 보면서 느긋하게 헤엄치지 않는가?
상어는 날렵하고도 날카로운 이빨로 온통 주변을 제압하지 않는가?
하다못해, 말미잘처럼 나보다 못생긴 생물도 빛과 공기를 접촉하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겨우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하는 전복도, 징그럽게 생긴 멍게 해삼, 개불도 우리 못잖은 좋은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까마득한 수중 아래서, 펄쩍 주저앉아 사는 게 운명 지워진 것이라고?
그렇다면 우리 뼈를 바꾸면 되지 않는가?
갈비뼈를 수직으로 올리고, 눈은 정면을 볼 수 있도록 좌우에 균형 있게 붙이자!
몸 색깔도 열대어처럼 노랗고 파란색으로 바꾸자.
도다리 친구는 해초만 먹느라 이빨이 없으니 그걸 붙여주자. 지느러미도 큰 물살을 헤칠 수 있게 등 위에, 몸통 좌우에 곧추세우자. 살은 흩트리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뼈는 매운탕을 하지만 않는다면 대부분 남겨질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물고기로만 남을 건 또 무엇인가?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자 날개뼈를 붙이고, 초원을 휘어잡는 사자의 억센 다리뼈도 붙여 보자. 그래도 그냥 바다에 남아야 한다면, 고래의 몸통만 한 등뼈를 가지는 것도 좋으리라!
본(bone)은 본(本)이며 근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질을 일깨워 줄 것이다.
살을 버리는 것은 뼈를 남기는 것이다.
그 뼈는 나와 도다리를 영원히 구분되지 않는 가자미목의 후손들로 남기는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