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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t Nov 07. 2024

벽(4)

6.

“오늘 오후 3시경, 태종대 앞바다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외상은 없어 타살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수사할 계획입니다. 고인은 지난 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주환씨로...”

이게 무슨 소리인가?

뉴스를 보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선생께서 실종되셨지만, 이렇게 주검으로 바다에 뜨다니!’

그의 죽음은 그 원인을 아직은 무어라 할 수는 없다

생활 형편탓이면 그와 내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 그는 그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간의 벽을 관통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누구의 아픔도 스스로가 되어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는 말도 뇌까리곤 했다. 그러면서 벽을 허무는 것은 직접 그 속에 들어가 보는 것 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당선 소감에서 밝힌 바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가 돌이 되고 고양이가 되어 본다는 것이 결국 사람의 관점을 벗어날 수 있겠는 가 말이다. 그런 것조차 실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떠도는 환상일 뿐이다. 그는 아마도 마음이 심란해 어릴 때 놀던 갯바위가에 갔다가 실족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해류를 따라 떠내려 갔으리라. 여전히 돈은 안되더라도 당선 이후로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데, 딱히 다른 이유는 없어 보인다. 경찰당국은 그의 죽음을 단순 실족사로 종결지었다.

부검을 해봐도, 주변에 원한 맺을만한 일도 없던 것이다. 단지 올해초부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든지, 기억이 흐릿해진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들려준 게 전부이다.

"전날 밤에 갑자기 명태국을 먹고 싶다고 하길래, 아침에 끓여 놓고 갔더니, 별로 손댄 흔적도 없는 거예요. 국 냄비가 별로 줄어들지 않았으니..."

"뭔 이 글을 쓴답시고 명탯국을 만들어 달랬나?"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의 아내는 나에게 노트 한 권을 보여주었다. 새 소설을 착상하느라 몇 자 끄적거려 놓은 원고 같다는 것이다.

"거기엔 ̒동네 노벨 문학가 김주환’이라는 장난스런 낙서가 함께 쓰여 있었다.

‘내 이름은 명태’

이런 제목으로 서두는 시작되고 있다.

할아버지대부터 우리는 이상 기상을 피해 고향 동해를 떠나온 이민 3세대이다. 할아버지는 그 고향 바다를 내내 그리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 조상은 함경북도에서 이름을 얻고 살기 좋은 동해 바다를 유영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세대 지나지 않아 바닷물이 따뜻해졌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조상들은 물이 차가운 북태평양으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우린 차갑고 시원한 물이 좋다. 그런데 요즘엔 오호츠크해에서도, 베링해에 사는 동료도 점점 살기 힘들다고 푸념한다. 산만한 빙하가 떠돌던 바다도 이젠 보기가 쉽지 않다. 덕택에 우리를 노리던 북극곰 녀석은 보기 좋게도 뗏목을 잃어 버렸다. 물개 녀석에게도 사냥하기 힘들어진 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은 여전하다. 그런데 어느날 빙산보다 더 큰 배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큰 그물을 펼쳤다.

"그 속으로 들어와!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차갑고 먹이 많은 곳으로 데려다 줄게!"

바닷물은 미지근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플랑크톤도 많이 떠나고 없다. 냉철한 우리에겐 더 차가운 곳이 필요하다.

"애들아! 얼음처럼 시원한 곳으로 데려다 준 데”

"정말?”

우린 그 유혹에 빠져 그물 안으로 들어갔다. 품에 안듯 투망은 우릴 감쌌다. 차가운 대기에 퍼득이던 순간도 잠시, 잠이 들듯 냉동고에 몸을 눕혔다. 여러 명태와 좁은 방에 들었지만 편안하다.

"얼마만 지나면 더 넖고 시원한 곳에 닿을거야 "

다시 거슬러 왔던 태평양을 횡단한다. 그동안 불편하지 않게 어부는 수시로 얼음을 채워준다.

"이 정도 고생쯤이야!”

부푼 기대는 힘듦도 견디게 한다. 어딘 지는 모르겠지만, 죽어라 헤엄쳐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고맙게 옮겨주고 있지 않은가? 냉동고에서 얼음을 덮고 며칠만 푹 자다 일어나면 꿈꾸던 곳에 도착할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내 몸을 둘러싼 비닐 랩에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북해산 명태 5,500원”

할아버지 고향이라 이름이 바뀐 거겠지!

"뭔 명태가 이리 비싸?”

나는 투덜거리는 주부 바구니에 담긴다. 가로57, 세로45cm 냉동고에는 벌써 다른 종이 들어차 있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고 언제 왔어?”

"그렇구나, 난 북해 출신이야! 같이 지낼테니 잘 부탁해!”

캄컴한 곳은 비좁긴 해도 몹시 시원하다. 한결 지내기가 낫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주인 아주머니와 잠시 산책을 나갔나 싶었다. 옆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사정을 모른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로 갔나?”

질투와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한다

"오늘은 명태국을 끓여 볼까”

바깥에서 내 이름을 갖다 붙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들린다.

"나도 드디어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가 보다!”

"여기도 좋긴 한 데 생각보다는 추워!”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다. 그간의 한기를 배려해 따뜻한 싱크대 위에서 몸을 녹이게 한다. 이젠 거꾸로 추웠던 것이 스르르 몸이 풀린다. 잠시 후에 몸이 뜨겁다. 살갗을 댈 정도로 너무 뜨겁다.

"너도 왔구나!”

대파도 무도 함께 누웠다.

"이게 뭐야? 난 좀 따뜻하기만 하면 되는 데”

'북해산 명태'

'명태국'

수식을 받던 내가 이제는 수식어가 된다.......

선생은 왜 명탯국에 숟갈을 대다 말았을까?

“이건 여전히 돈이 안돼!”

그가 작년에 응모하려다가 집어 던지고 만 수필 초고가 생각난다.

"벽은 수평적 시선을 수직적으로 전환한다. 그것으로 소통은 끊어지고 삶의 어려움을 그 속에 감춘다. 벽은 외부로부터의 보호와 담장을 넘지 말라는 금지를 모두 껴안는다. 그런데 벽화는 안을 향하는 시선을 넘나들지 못하게 현혹하는 것이다. 현대적 벽이 포스트 모더니즘적 해체를 통해 시선을 안에서 밖으로, 또 그 반대로 전환시키지만, 벽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 투명 아크릴 판이 보균자로부터 나를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서로가 벽의 안쪽임과 동시에 바깥이 되는 모호성이다.“

7..

선생이 기거하던 무덤골에서 바라보는 금융타운과 타운에서 쳐다보는 무덤골은 확연히 다르다. 내려다 보는 것과 올려다 보는 시선은 전도되어 있지만, 벽을 허문다고 평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내려오지 못할 곳과 오르기를 거부하는 공간으로 공존한다. 무덤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집은 공존하고 있는 데, 산 자들끼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무덤골은 마침내 도시정비계획으로 사라졌다. 이젠 벽화가 시선을 돌려 내부를 가리는 역할도 함께 무너졌다. 무덤을 깔고 지었다는 윤리적 비난도 함께 묻혔다. 그렇게 손가락질하던 무덤골 위에, 그보다 훨씬 높은 아파트 단지가 금융타운과 마주본다. 쾌적한 주거 단지에 맞게 시민 공윈도 멋지게 조성되었다. 이제 담장은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아랫동네는 점점 더 높은 담장으로 포위되고 있다. 수연은 그녀의 남편과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건널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제는 넘을 수 없는 담벼락같은 곳에서.

그런데 주환 선생은 정말 명태를 좇아 바다로 뛰어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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