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나는 친구 둘과 허름한 술 집에 앉았다. 바깥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어깨를 붙이고 길을 지난다. 더러는 과장된 몸짓으로 바짝 붙은 연인도 보인다. 하늘하늘한 살구색 치마 아가씨는 귀여운 몸짓으로 우산을 든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다. 참 부러운 광경이다.
"야! 우린 이게 무슨 꼴이냐? 애인 하나없이 시커먼 남자끼리 이리도 우중충하게 앉았으니, 무슨 청승이람!”
대학 입학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 데, 똑같은 녀석들처럼 우린 여자 친구 하나 없었던 것이다.
"뭐가 못나서 이 지경이지?”
인수가 푸념을 늘어 놓는다.
"우리 보다 못한 놈들도 다 여자 친구가 있잖아!”
"그럼 시영이 네가 어디 하나라도 꼬셔 와 보던지!”
"그러지 말고 우리 이 참에 여자 친구나 한 번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싸구려 술이라도, 그 기운이 뻗쳐 올라 온 것일까?
진균이 갑자기 용기를 낸 듯 이런 제안을 해 오는 것이다.
"그래. 못할 것 뭐 있겠어? 한 번 나가보자고!”
술자리에서 벗어난 우리는 무작정 길거리로 나섰다. 혼자이면 용기도 나지 않을 일이지만, 셋이니 그래도 힘이 생긴다. 술 기운이 더 큰 역할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걸음은 주춤거린다.
"죄송합니다. 우린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라..”
"우린 이미 임자있는 몸이예요”
정중한 거절 앞에 우리는 점점 힘이 빠진다. 역시 안 되는 건 안되는 모양이다. 이러다가는 밤을 세워도 성공하기는 글렀다.
"에이, 그냥 돌아가자. 우린 안되는 모양이다.”
"가만 있어 봐! 저기 아가씨 둘은 어때? 둘만 있는 모양인 데...”
"숫자가 모자라잖아. 우린 셋인 데!”
"아니지. 일단 성사가 되면 나중에 따로 숫자를 맞춰 다시 미팅을 할 수도 있고, 일단 시도해 보자”
진균이 용감하게 그녀들의 우산 아래로 파고 들었다.
"실례합니다. 두 분이서 나오셨나봐요? 혹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뭐 그런 건 없어요.”
둘 중 하나는 성격이 아주 개방적이다. 뜻밖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막상 찻집에 앉으니 그 아가씨는 까칠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나마 붙임성이 있는 진균은‘̒그게 아니고...’를 연신 반복하면서 일의 성사를 향해 온 힘을 다한다. 옆에서 반쯤은 거들어야 하는 나는 되레 거들먹거리는 그 아가씨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남녀간의 관계가 그러함에도 괜히 굴욕같은 걸 느꼈던 것이다.
"야, 그만 돌아가자!”
나는 이 수모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이 자식이 쓸데없는 소리를...”
사태는 간신히 누그러져 우리는 다음 어떤 날 3:3 미팅에 합의하게 되었다.
"야, 시영이! 넌 다 되어가는 데 그 딴 소리를 하냐?”
"미안,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얼마나 성질이 나던 지...”
"여자를 사귀는 과정은 당연히 굴욕적인 걸 갖고. 그러니 여태 이렇게 살지!”
"그나저나 어때? 그 빈정거리던 아가씨 옆에 흰 옷 차림 아가씨는 귀티나게 보이던 데.”
"성격도 차분한 게 괜찮았어.”
"얼떨결에 약속은 얻어냈지만, 정말 다시 나올까?”
"나오겠지 뭐! 아니면 또 다른 추억을 쌓았으니 그것도 괜찮지”
그러저러 그들과 약속한 날짜가 되어 우린 지정 장소로 나갔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 쪽이 보였다. 약속대로 한 명을 더 보완해 짝을 맞췄다. 나중에 보니, 내심은 모두 그 흰 옷 아가씨에게 쏠려 있었다. 우리는 제비 뽑기를 통해 짝을 정했다. 운좋게도 나는 그녀와 파트너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녜요. 제 친구가 워낙 여과없이 말을 쏟아 내는 걸요!”
수연은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집안 형편으로 가족을 부양할 경제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상 출신이라 금융쪽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만난 그날은 여러 고민을 북적이는 곳에서 잠시 잊으려 한 것이다. 심적 여유가 없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가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다음에 다시....”
나는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는 데 뜻밖에도 그래도 좋다는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녀와 몇 번 편지로,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났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는 세상에 대한 까닭없는 불안감으로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수연과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별 진척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만나주는 것이 고맙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정면으로 표현하지는 못하고, 이 만남이 계속 유지될 지에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고 나는 간만에 그녀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너무 떨어진 시간이라 그럴 필요도 없는 데 괜히 만날 핑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대의명분을 꾸몄다. 농간을 부려, 군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와 그녀에게 부친 편지가 우연히 바뀐 것으로 조작한 것이다. 군에 있는 허무인 선배에게 수연에 대한 나의 심정을 드러내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물론 선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는 편지와 함께 그 속에 같이 넣은 사진을 돌려달라는 핑계로 그녀를 만나자는 명분을 만든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 친구 하나를 동반한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수연은 이제 생명보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하는 일은 어때요?”
"적성에 맞긴 하지만, 내부적으론 좀 힘든 것 같아요. 대졸 신입들은 우리같은 고졸이 지적하면 고집만 피우고, 그러면서 월급은 더 받아가고...”
그녀는 내부관계에서 다소간 반발심을 가진 분위기였다. 셋이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녀는 주말이면 다니는 고아원 이야기를 즐거운 듯 꺼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녀는 매주마다 자원봉사차 들른다는 것이었다.
"지난 주 애들과 계곡에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속에는 3-40명의 원생들이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 않았다면서 그것을 보여 주었다. 두 장을 딱지처럼 접었는 데, 큰 글씨체로 두 자가 쓰여 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각각에 '바', '보'라는 단어가 씌어 있었다. 그녀는 아마 나의 농간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만난다고 하니 부치지 않고 가져 온 것이리라.
"제게 주실거죠?"
나는 이 순간 친구와 함께 온 게 후회되었다.
"아뇨!”
순간 나는 내가 그것을 교환할 수 있는 인질을 하나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 편지 보여주지 않으면 애들과 찍은 이 사진, 돌려주지 않을 겁니다"
허를 찔렸다 싶던 그녀는 역제의를 해왔다.
"사진 먼저, 그럼 편지 드릴께요.!"
"야, 먼저 주면 안돼!"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한 친구가 나를 제어했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먼저 건냈고, 편지는 끝내 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속에는, 용기있게 다가오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는 내용이 쓰였을 듯 싶다. 그리고는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훈련소 시절이라 그런지, 인기있던 전우는 하루에 10통도 넘는 편지를 받는 녀석도 있었다. 문득 그녀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답장은 받질 못했다. 그리고 자대에서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시영씨 보이소! 저는 곧 결혼하게 됩니다.“
다른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다. “결혼”이란 말 밖에.
나중에 그녀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가 그 놈임을 알 게 되었다.
하염없이 굵은 비가 내렸다. 이상하리만치 그녀는 비로 연결되었다. 처음 부딪칠 때도, 가끔씩 만나는 날마다, 마지막 편지를 받을 때에도 모두 빗속에 묻힌 날이었다. 수연은 배따라기의 '비와 찻잔 사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나도 그 노래가 좋다. 그녀와의 이야기는 몹시 어정쩡하게 흩어졌지만, 비오는 날이면 그녀가 떠오른다. 그렇게 어설픈 시절을 나는 떠나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바' '보'라는 그 글자는 아직도 선명한 데...
수연은 이제 모호한 경계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제는 늘 바깥에서만 쳐다보던 벽을 넘어 안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일까? 나는 여전히 바보로 남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