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서 아님 주의
아기를 낳은 후 예전처럼 책을 읽기란 쉽지 않았다. 핑계를 대보자면, 언제 울어댈지 모를 아기에게 신경이 곤두서있어 온전히 책 내용에 집중하기도 어려울뿐 더러 머릿속이 온통 아기라 책의 내용이 흡수될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침대 맡엔 읽다가 이내 포기하는 책들이 산을 이뤘고 표지조차 못 넘긴채 도서관에 반납한 책들도 수두룩했다.
그 와중에 아침 콩나물국처럼 책장이 술술 넘어가던 책이 두 권 있었으니,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완성된 삶을 위하여>(문학과 지성사)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민음사)다.
두 책의 공통점이자 좋았던 점은, 우선 두껍지 않다는 것. <삶과 나이>는 192페이지로 다 읽는데에 약 5일,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103페이지로 약 이틀이 걸렸다. 아기를 재워놓고 틈틈이 읽기에 딱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기쁨을 만끽 할 수 있었다. 두께는 이처럼 얇지만 그 내용은 결코 얕지 않다. 오히려 두고두고 곱씹어볼만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서술되어 더 쉽게 읽힌다는 점도 좋았다. <삶과 나이>는 작가가 인생에 대해 했던 강의의 대본들을 묶어낸 책이고,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작가가 딸을 낳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학생이 된듯, 또는 작가의 절친한 친구가 된듯, 그들의 철학이 친근하고 생생한 언어로 들려온다.
결정적으로 이 두 권의 책은 내가 읽어본 중 가장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육아서적'이었다. 육아서 코너에 놓이는 책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즘 날개 돋친듯 팔린다는 모 유명 육아서들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삶과 나이>는 아이의 현재, 유년시절, 청년시절을 거쳐 완벽한 독립적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긴 인생의 과정과 그 속에서의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아이는 이 껍질 속에서 성장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다고 껍질 속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성장을 통해 고유한 의지와 독립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는 물론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이를 늘 어린아이로만 취급하는 부모의 성향 - 이는 특히 너무 "엄마 같은" 엄마 혹은 권위적이기만 한 아빠에게서 잘 나타나는데 - 이 그런 장애물에 속합니다. 그것은 자기애와 지배욕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안주하려는 아이의 태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노력하여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기를 꺼리고 마냥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들, 또는 이와 유사한 원인으로 인해 유아적 상태가 고착화될 위험이 생겨납니다. 어린애 같은 태도가 다음 삶의 시기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런 성향을 은밀하게 속에 품은 채 노년까지 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의 교육을 맡은 어른에게 중요한 과제가 주어집니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놓아주는 것이 그 과제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기 나름의 길을 찾도록 자극을 주고 거기에 익숙해지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삶과 나이> 중에서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지난 글에서 내가 고백한 바 있는) '아들 제대로 키우기'라는 고민에 대한 해답지같은 책이었다. 딸을 둔 엄마에게 적은 글이지만, 읽다보면 아들에게 올바른 성관념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정리가 된다.
1. 충만한 사람이 될 것.
2. 육아는 부부가 같이 할 것.
3.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4. '유사 페미니즘'의 위험성에 주의할 것.
5. 독서를 가르칠 것.
6. 흔히 쓰이는 표현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7.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
8.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9.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칠 것.
10.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신중해질 것.
11. 우리 문화가 사회규범에 대한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12.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13. 사랑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 응원해 줄 것.
14. 억압에 대해 가르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자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 <엄마는 페미니스트> 중에서
비단 육아 뿐만 아니다. 난생 처음 엄마로 사는 나 자신을 다잡고 돌보는 데에도 이 두 권의 책은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의 작가가 열네 가지 행동강령들 중 첫 번째로 꼽은 건 엄마 스스로 '충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일하기와 돈벌기로부터 오는 자신감과 충족감을 포기해도 되는 이유는 절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일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은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이라는 대목. 또는, 육아를 하며 생기는 실수는 당연한 것이므로 죄책감을 내려놓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고 기본적 욕구를 채우며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에 더 신경쓰라는 대목. 서툴고 지친 모든 초보엄마들의 손을 꼭 잡고 건네주고 싶은 부분이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아기 키우기에 정신이 온통 팔려있다보니 그 동안 눈에 들어왔던 책의 종류도 전부 그 언저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단순한 육아스킬들만 나열해둔, 그야말로 게임공략집같은 육아서들은 들여다보면서도 내가 애를 키우는건지 미션을 수행하는건지 헷갈릴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은 나에게 더 보석같다. 읽는 내내 엄마로서, 나로서,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잔뜩 부풀어올랐으니.
앞으로도 육아의 위기가 닥칠때마다 닳도록 꺼내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