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그 오빤 이미 신천 바닥에서 유명했다. 갸름한 얼굴, 기다란 눈매, 쭉 뻗은 콧날. 이정재를 닮은 맥도날드 알바생이라 하여 '맥정재'라는 별명도 갖고있었다. 맥정재가 오늘은 안 나왔네, 머리를 자르고 왔네, 주문 받다가 계산 실수를 했네, 유니폼에 케첩이 묻어있네 등등. 그에 대한 사소하고 자잘한 모든 것들이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치만.
그치만.
그가 맥정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훠얼씬 전부터 내가 먼저 좋아하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 '맥정재'라는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정아는 속으로 부아가 올랐다. 나만의 연인이 모두의 연인이 되어버린 그 기분. 누가 알랴.
정아가 그를 처음 본 건, 올해 2월이었다. 새 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그 어수선한 분위기. 기세등등했던 찬 공기가 점점 느슨해지고 어디선가 조금씩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 단축수업으로 오후가 텅 비어버리는 그 때.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신천 맥도날드 앞에서 만나."
정아는 전날 밤 미리 코디해 둔 체크 플레어스커트와 랄프로렌 니트로 재빠르게 갈아입고 맥도날드 앞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날따라 추웠고 치마는 짧았고 다리는 아팠고 아이들은 늦었다. 정아는 하는 수 없이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앉아있기가 좀 뭣해서 메뉴판을 보러 다가간 카운터에서, 그를 보았다. 정아는 직감했다. 저 사람 때문에 한 동안 많이 아프고 힘들거라는 걸.
이후의 수순은 뻔한 것이었다. 정아는 맥도날드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빠듯한 용돈 때문에 비싼 메뉴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나마 가격대가 저렴한 해피밀을 주문했다. 출처를 알수 없는 패티와 치즈, 피클 두어개가 내용물 전부인 버거를 최대한 조금씩 뜯어먹으며 그를 훔쳐봤다. 그가 웃을 땐 정아도 따라 웃음이 났고, 다른 알바 언니랑 잡담을 할 때는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딸려오는 플라스틱 장난감은 막내동생에게 선심쓰듯 주었는데 나중엔 꽤나 그럴싸한 콜렉션이 되었다.)
청소당번이어서 집에 들러 사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교복 차림이라고 해서 맥도날드에 가는 걸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젯밤 꿈에도 나온 그를, 정아는 오늘 또 직접 눈에 담아야만 했다. 급한대로 신천역 화장실에 들러 이리 저리 멋을 부려보았다. 넥타이는 끌러서 가방에 넣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목이 좀 길어보이는 것도 같았다. 교복치마 허리를 한단 접었더니 길이가 깡충해졌다. 맘에 들었다. 그의 맘에도 들면 좋을텐데. 정아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만나러 갔다.
"해피밀 하나 주세요."
"어, 오늘은 교복 입고 오셨네요?"
그가 정아를 아는 척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심장이 한 순간에 내려앉았다.
"저.. 아세요?"
"알죠. 매일 오셔서 해피밀 드시잖아요."
그는 정아를 알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새하얘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진 것만은 확실했다.
"해피밀만 드시면, 배 안고프세요?"
그가 물었다. 정아가 주춤주춤 건넨 돈을 받으면서 그는 씨익 웃었다.
머릿속에서 이런 상황을 천만번 넘게 시뮬레이션 해봤으면서도, 갑작스레 닥치니 정아는 어쩔 줄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니, 방금 뭐라고 물어봤지. 뭘 물어본 것 같기는 한데,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정아의 눈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도 싶은데 등 뒤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무엇에 홀린듯 정아는 말했다.
"교, 교복을 좋아하시나봐요!!!”
목소리 조절도 제대로 안되어서, 헛소리를 생각보다 크게도 외쳤다. 매장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정아와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한거지, 하고 떨떠름해 하는데 갑자기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가 번쩍 정신을 들게 했다.
"잔돈 900원입니다."
케첩이 묻은 듯 벌개진 얼굴을 한 정아는 동전들을 주머니에 급히 밀어넣고 해피밀은 받지 않은 채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리고나선 한 동안 맥도날드를 찾지 않았다.
정아가 맥도날드를, 해피밀을, 그를 끊은 그 즈음부터 학교에 '맥정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신천 맥도날드는 사실상 만남의 광장이나 다름 없어서, 그 앞을 지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정아는 친구를 기다릴 때마다 유리창 너머로 그를 찾았다. 매장 안은 그를 보기 위한 여학생들로 전보다 더 버글버글했다. 그는 여전히 그같은 자리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자신에게 웃어주던 바로 그 해사한 표정으로. 정아의 입 안 가득, 저렴한 패티의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두 달 쯤 지났을까. 그는 돌연 자취를 감췄다. 소문에 의하면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연예인 준비를 한다고도 했고, 복학해서 다시 학교에 다닌다고도 했고, 중학생 여친이 생겼다고도 했다. 이러나 저러나 정아에게는 별로 해피하지 못한 16살 여름이 무심히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