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밤산책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퇴근길이었다.
8시 정각에 울리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늘 오르고 내리던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빠른 걸음으로 4분이면 충분한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늘 그래왔듯,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는 4번 정류장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여름이 온 것만 같던 더위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덕에 금세 희미해져 갔다.
‘내가 버스를 놓친 이유가 이 비가 전하는 마음에 한 순간 매료되어서일까 ‘
8시 5분쯤 정류장 벤치에 앉았고,
내가 여러 음악들을 거쳐 나의 버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2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였다.
언제나 8시 10분쯤 지나는 버스는 확인해 보니 벌써 다섯 정거장은 앞서간 뒤.
나는 무엇에 정신을 빼앗겨, 분명 바로 앞에 멈춰 섰을 버스조차 보지 못했을까.
허탈함이 드는 듯했지만,
곧장 어린아이 와도 같은 모험심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기분 좋게 내리는 비, 좋아하는 어둠이 깔린 시간, 바쁘지 않았던 하루덕에 남을 대로 남은 체력, 함께 일하는 동생들에게 얻은 정신적 에너지,
이 많은 이유들이 나를 밤 산책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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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반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와 시간은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산책에 걸맞지 않은 거리는 다소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전에 살던 동네인 대학가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밤 산책의 시작 지점을 설정해 본다.
목적지로 향하는 짧은 순간동안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는 게 보였다.
어느덧 기사님의 시야를 방해하는 빗방울들은 가차 없이 와이퍼에 밀려 밖으로 밀려나간다.
잠시나마 충동으로 다가온 산책의 마음을 미뤄볼까 싶었다가,
비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는다.
대학교 안까지 운행하는 마을버스는 나의 산책을 응원이라도 하는 듯,
이날 나의 밤 산책 코스로 가장 안성맞춤인 출발지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밤이 깔렸음에도, 비가 내림에도, 활기가 흐르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진정한 퇴근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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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곧장 내 시야 든 모습은 대학교의 메인 운동장의 모습이다.
언제나 운동하는 학생들, 주민들로 가득한 곳.
그들은 내리는 비가 개의치 않다는 듯 저마다 뛰고, 공을 차고, 던지는 중이다.
옆으로 길게 자리한 테니스장에는 저마다 공이 오고 가는 소리로 리듬이 만들어지는 듯 보인다.
젊음을 상징하는 대학생들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는 내 모습.
어린 친구들의 옷차림만 봐도 나의 산책길은 한층 더 즐겁다.
‘요즘은 이런 스타일이 유행이구나’ 같은 아저씨 같은 구수한 마음과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순수함들을 보면 나의 시간이 조금은 나에게 여유를 베푸는 것만 같다.
그렇게 느리게 먹는 나이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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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안을 벗어나 눈부신 간판들이 즐비한 술집 거리를 지난다.
평소라면 피로를 느낄 장면들이 이날만큼은 기분 좋은 비처럼 나를 적신다.
나 역시 이 기분을 만끽하고자 손에 쥔 접이식 우산을 접어 넣고, 내리는 비와 주변 소리를 맞이한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재빠르게 시끄러운 골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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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걸어,
익숙하고 조용한, 내가 애정하는 동네로 접어든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그보다 더 오래된 주택들이 조화롭게 자리한 동네.
지역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순환도로가 머리 위로 지나는 탓에 곳곳에 옆동네로 넘어갈 수 있는 굴다리가 놓인 동네.
그 덕에 음침할 수 있는 길들을 꽃과 나무로 가득 채워 놓은 동네.
조용하지만 침묵이 두렵지 않고,
어둡지만 골목을 비추는 꽃들이 빛나는 곳.
이 길의 끝에는 나의 진정한 퇴근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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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밤 산책으로 이끌었는가에 대한 생각을 걷는 내내 해본다.
정말이지 지난 며칠간의 더위를 씻겨 준 비가 반가워서인지,
마음에 담긴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취향에 딱 맞는 노래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확신하는 한 가지는
평소에 수없이 오늘 지나온 길들을 걸어온 나이기에,
이 반가운 비와 마음을 채워주는 누군가의 음악을 핑계 삼아 걷기 시작한다면,
분명 하루의 마무리가 즐거울 것이라는 그런 확신.
이 확신이 나를 긴 산책길로 초대한 것은 아닐까.
덕분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잔향처럼 스며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