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라소니 Oct 28. 2020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진로-2

“제 스펙으로 마케터가 될 수 있을까요”

“마케터가 되려면 뭘 준비해야 하나요”


  대학교 2학년 때 경영학원론 수업을 들으면서 마케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프레젠테이션도 척척 해내고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 마케팅 관련 직종을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의사, 판사, 공무원처럼 시험을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멋있고 전문직스러우면서도 뭔가 손에 닿을 수 있는 꿈처럼 느꼈다. 21살 때부터 줄 곧 내 꿈은 마케터였고 36살인 지금은 꿈을 이루어서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월급쟁이로 살고 있다. 점심 먹고 난 다음 목에 출입카드 걸고 커피 한잔 든 채로 동료들과 걸을 때는 ‘그래도, 성공했네’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야 육아에 찌들어서 겨우 세수하고 머리 질끈 묶고 맨투맨에 청바지 입고 출근하지만, 동료들은 세련된 오피스룩의 멋진 남녀가 많다 보니 대리만족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


  오늘에 이르는 15년 간의 과정은 ‘존버의 시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시작은 대학시절 경영학과 수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전공이던 영어영문학은 너무 안 맞아서 어떻게 하면 수업을 덜 들을까 고민했고 복수전공이었던 경영학 중에서도 마케팅 관련 수업은 예습에 복습까지 할 정도로 정말 재밌었다. 수업 중에 교수님이 당시에도 취업이 어렵다며(2004년 무렵) 저학년부터 준비해야 서류전형에서 빈칸이라도 메꿀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핫하던 유통회사의 인턴 모집 공고 링크 주소를 알려주시면서 본인이 자기소개서와 경력사항에 뭘 쓸 수 있는지 고민해보라고 하셨다. 졸업예정자부터 지원할 수 있었지만 2학년이었던 나도 한번 써봤다. 성장배경에 중고등학교 때 반장이랑 학생회 한 거 말고는 자격증도 영어점수도 특기라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스펙도 채우고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아보자고 결심하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마케팅이랑 관련 있는 경험이 뭐가 있을까 했는데 찾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다. 세상에나. 신입사원 뽑는 것도 아니고 대외활동이나 인턴을 선발하는데도 자기소개서랑 경력사항, 심지어 면접도 2차 3차까지 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대학생 마케터나 단순 모니터링 요원에도 지원했는데 매번 탈락만 했다. 그러다가 첫 한 번만 뚫으면 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몇천 명씩 몰리는 유명한 곳 말고 면접도 안 보는 작은 사이트의 모니터링과 지원하면 거의 다 뽑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자원봉사에 자소서에 공을 들였다. 합격 문자를 보고 수업시간에 혼자 입을 틀어막고 완전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화장품 전문 쇼핑몰의 모니터링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화장품을 써볼 수 있었고 후기도 쓸수록 실력이 늘었다. 덕분에 잡지사, 국내 유명 화장품 회사의 대학생 마케터와 모니터 요원을 3개나 하게 되었다. 직접 회사를 방문하고 주기적으로 좌담회에 참석해서 출시 전 제품을 써보고 실무자들을 만날 기회도 생겼다. 몇 시간 동안 진행되다 보니 다른 대학생들은 요새 어떤 대외 활동을 하는지 열심히 듣고 집에 와서 바로 검색한 다음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다음번에는 지원하기를 반복했다. 3학년이 끝날 때쯤에는 정말 많은 대외활동과 스펙을 쌓을 수 있었다. 통신사, 핸드폰, 화장품, 식품 프랜차이즈, 광고회사, 인터넷 포털 등에서 대학생 마케터로 활동했었다.


  여러 대외 활동을 통해 정말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사람들과 나중에는 취업시장에서 경쟁하겠지 하는 생각에 긴장감도 느꼈다. 그래도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나름 PT 자료도 잘 만들고 발표도 꽤나 한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학교에 예쁘고 멋있고 다들 말은 또 얼마나 잘하던지. 기가 죽을 때도 많았지만 ‘이번에는 이거 한 개는 꼭 배워가야지’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처음에는 개인별로 과제물을 해가는데 창피해서 못 내놓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잘하는 사람들이 결과물을 만들고 표현하는 법을 보면서 배웠다. 이후에 다른 대외활동을 하게 되면 내가 직접 비슷한 방식으로 해보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대외 활동을 주최하는 회사들은 대학생 마케터나 모니터링 요원들에게 뭘 얻고 싶어 하는지를 좀 더 깊이 고민했다. 해당분야를 열심히 찾아보고 분석해와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무자들보다 잘 알 수는 없었다. 내 경우에는 좌담회나 아이디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주변 친구들에게 직접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물어보고 갔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소비자의 말로 풀어서 설명할까 생각했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시각화해서 결과물로 담아냈다. 실제로 인터넷 포털 대학생 마케터와 핸드폰 마케터는 활동 종료 시에 우수 포상을 받기도 했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가장 크게 어필했다.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위의 수많은 대외 활동과 틈틈이 취득한 자격증과 영어점수에도 취업스터디원으로 들어가는 거 조차 쉽지 않다는데 또 충격을 받았다. 인 서울 사립대 스펙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직접 엄청나게 체계적인 커리큘럼 짜고 스터디원을 인터넷 카페에서 모집했다. 내가 들어가고 싶었던 스터디 그룹의 장점만을 모아놨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취준생의 지원 메일을 받았고 나한테 도움이 될만한 스펙을 가진 사람만으로 골라서 취업 스터디 그룹을 운영했다. 스터디 장이였지만 나이도 제일 어리고 스펙도 상대적으로 쳐졌지만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6개월 뒤에는 모든 스터디원이 취업에 성공했는데 쟁쟁한 스터디원 들과 자기소개서도 공유하고 면접 연습도 같이 했던 게 정말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면접 전에 해당 회사를 간접적으로라도 꼭 경험해보고자 했던 것도 작지만 다른 지원자와는 차별화가 되었다. 첫 회사가 글로벌 명품을 국내에 유통하는 회사였는데 지원서를 써보기 전에는 해당 브랜드를 써볼 기회도 매장을 가볼 기회도 없었다. 면접 직전에 백화점 명품관 3곳을 찾아가서 매장의 인테리어나 분위기, 손님 응대하는 법, 가장 판매가 잘 되는 제품과 운영에서 개선하면 좋을 만한 포인트 등을 정리하고 면접에 임했다. 영어실력도 떨어지고 학벌도 상대적으로 별로였지만, 내가 면접관이라도 나를 뽑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이때는 대학생 내내 했던 모니터 요원 활동을 했던 경험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 면접을 앞두고서는 마케팅 부문 서류 합격자들이랑 스터디를 일주일 간 했었다. 다들 고만고만해서 걱정만 하던 차에 쿠킹 클래스를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차 면접 2일 전에 있을 그 쿠킹 클래스는 정말 너무 간절하게 참여하고 싶어서 정성스럽게 응모했다. 운이 좋게도 쿠킹 클래스에 참석해서 회사 관련 제품도 써보고 최근 이슈사항도 듣고 마케팅을 담당하는 실무자랑 말도 몇 마디 나눠 볼 수 있었다. 덕분에 2대 1 심층면접으로 진행된 2차 면접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었고, 나중에 들었지만 그해 마케터는 단 1명을 뽑았던 최종 면접에서도 톡톡히 덕을 봤다고 했다.  


  내가 가장 우수한 인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 번에 모든 핸디캡을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실행하고 거기서 하나라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아졌고 성장할 수 있었다. 간절하게 집중했고 긴 호흡으로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마케터로 밥벌이하고 잘 삽니다.

이전 02화 내 몸이, 내 본능이 거부하는 일은 못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