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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라소니 Sep 18. 2020

내 몸이, 내 본능이 거부하는 일은 못 한다.

#진로-1

“마케터가 잘 맞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뭐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일 년에 한두 번 대학교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시간을 내서라도 가고 있다. 매번 받는 질문인데, 그 시절 나도 제일 어려운 문제였다. 내 경우에는 엄청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창 시절 수능점수까지 나와야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자존심도 세고 꽤 성실한 편이어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앓던 숫자 울렁증이 심해져서 고등학교 때는 수학 포기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약한 부분을 메꿔야 하는데, 못하니 싫어하고 점점 미루는 악순환이 반복됨에 따라 어느 수준 이상의 점수를 받기는 어려워졌다. 재수하자니 내가 나를 너무 잘 아는데 1년 더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니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단언컨대 재수를 했어도 점수는 잘 안 나왔을 거다. 나보다 더 성실하고 체계적이신 우리 아빠는 수능에서 수학 점수를 안 보는 학교를 수능 배치표에서 찾아오셨다. 수학 빼고는 점수가 좋았던 덕분에 문과에서 합격선이 높은 편인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와서 제일 좋았던 게 수학 안 하는 거였는데 이번에는 영어가 문제였다. 싫어도 해야 하는데 수학의 악의 고리는 영어로 번졌다.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도 많고 원서로 책을 읽으려니 겨우 졸업 필수 학점 채우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문과생이 나중에 취직이라도 하려면 복수 전공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경영학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전체 졸업학점도 채울 겸 그 시간만이라도 영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점이 그저 행복했다.


  그러다가 마케팅이라는 수업을 듣는데 재밌었다. 신문 기사나 책 찾아보면서 정리하고 발표하고 여러 명이 팀 프로젝트로 하는 게 나한테는 스트레스가 아녔다. 숫자도 안 나오고 한글로 읽고 써도 되니 식은 죽 먹기 같다는 생각이었다.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영문과랑 경영학과 친구들을 보니 팀플 하다가 암 걸릴 거 같다고 혼자 책 읽고 리포트 쓰고 시험 보는 게 훨씬 낫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게 더 나한테는 신기했다. 이런 이유로 아 나는 경영학과 수업 중에서도 마케팅이 맞는구나 하는 매우 원초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철밥통과 전문직이 좋다는 인식 때문에 남들 따라 나도 공무원 시험, 공사나 공단, 로스쿨도 준비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럴 때는 급하고 뭐든 빨리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큰 도움이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공무원 시험이나 공사의 시험공부 기초가 된다는 법학과와 경제학과 전공 원론 수업, 경영학과의 회계 원리와 재무관리 수업을 들었다. 결론은 다 폭망 했다. 정말 열심히 예습, 복습에 시험 기간에는 밤을 새워가면서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없을 정도로 했는데 F 같은 C와 D를 받았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어서 다음 학기에 재수강도 해보고 더 열심히 해봤는데 자괴감만 심해질 뿐이었다. 이에 나는 빠르게 손절하고 포기를 하였다.


  그 이후로 부모님이나 주변에서 ‘너는 공부도 좋아하고 성실하니 수험생활 몇 년 하면 시험 붙을 거 같아’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안 그래도 해봤는데 20년 공부해도 전 안될 것 같아요’라고 하면 다들 금방 수긍하셨다. 20대 초반에 몇 달간 짧게 고생은 했지만, 적성에도 없는 시험공부를 막을 수 있는 가성비 높은 귀한 시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첫 회사에 다닐 때 신입사원 시절 엑셀로 매출표를 정리하고 결산 금액을 맞추는 일을 하는데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다. 은행에 원서도 써봤지만 매번 서류에서 탈락해서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는데 이때 이후론 그런 불만은 싹 사라졌었다. 이후에도 이런 업무는 일단 거르고 봤고 사회초년생 때 숫자가 안 맞아서 밤새고 울면서 집에 가던 일은 한 번도 겪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게 일단 공부를 하든 수업을 듣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볼 수 있는 일을 해보기를 권한다. 해당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정말 강도 높은 공부가 필요한데 그것을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지 그것을 실험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합격해서 그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다고 해도 하루에 최소 8시간씩해야 하는데 궁합이 맞는지는 꼭 맞혀봐야 한다. 뒤늦게 이게 아닌 거 같은 데라고 느끼면 그 기회비용이 아까워서 빨리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10년간 마케팅 업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와 너무 좋아서라기보다 이건 못하겠다 싶은 분야를 빨리 필터링한 과정의 결과이기도 했다. 마케팅 사례 보고 스토리 짜서 발표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밤을 새워도 덜 피곤했다. 그러니깐 오래 할 수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니깐 조금씩 능력치도 보완되면서 밥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본인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잘 모르겠다면 기회를 주면서 내가 주는 사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관련된 일이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직감을 믿고 아닌 것부터 거르는 데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우선 범위를 좀 좁힌 다음에 오래 하다 보면 노하우도 쌓인다. 아 그것보다는 낫지 하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줄이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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