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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차나 Sep 05. 2021

주치의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다

Chapter 3. 용서 대신 견뎌야 하는 것

그간의 이야기를 했더니 J 주치의 선생님은 나지막이 말했다.


 “많이 상처가 됐을 것 같은데.”


괜찮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 앞이었으므로. 퇴사하고 실업급여, 산재를 받을 테지만 그 이후에 재취업이나 재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토로를 이어갔다. 주치의 선생님은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이런 언덕을 지나고 있어요. 이 아래에 서있는 지금은 언덕 다음에 뭐가 있는지 안 보이죠? 지금은 안 보이지만 여기가지 가면 보이겠죠? 반대쪽도 보이고 지나 온 길도 앞으로 갈 길도 더 넓게 보일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 조금 더 걸어가면 돼요.”


나의 지나온 일 년 같은 굴곡진 언덕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는 사실 내일 정도의 걱정만 해도 충분해요. 모든 걸 다 계획해도 진행하면 또 다른 게 보이거든요. 또 쉬고 나면 이 사건에 대한 차나 씨에 대한 관점도 달라질 거예요. 우리는 A라는 시기를 끝내고 B 씨기에 들어와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A라는 시기를 잘 매듭지었을 때 그때가 바로 B시기예요. 그러니 사건을 마무리하는 게 곧 새로운 시작이란 걸 기억해요. 지금 차나 씨는 이미 새롭게 시작한 거예요.”


당장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상사를 고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포기했다는 말에 대한 그의 코멘트에는 동의할 수 었었다.


“지쳐서 쉽게 단념하면 나중에 후회가 될 수 있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울어버렸다. J주치의 선생님에게 별 얘기와 한탄을 다 했지만 운 것은 처음이었다. 이 눈물은 슬픔이 아닌 분노였다.


‘지금껏 생각해서 결정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하라뇨. 더 이상 그럴 힘은 없어요’

라는 생각에 J주치의 선생님에게 화를 낸 것이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된다는 신뢰가 쌓여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당황해 “지금 무슨 생각 중이에요?”, “어떤 점이 지금 힘들어요?”라고 물었지만 나는 답을 뜸 들였다. 결국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하는 것으로 끝냈지만 언제나 선생님의 이야기만 듣던 내가 반론을 제기한 건 처음이었다.


환자와 주치의의 관계도 결국은 인간관계였다. 신뢰와 공감으로 이루어진 페이스 메이커.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구비구비 고비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은 넘기지 못할 것 같았던 그해를 살아 넘기게 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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