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호칭의 세계
근데 제가 오빠 동생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사촌동생의 예비 신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였다. 2년 연애 끝에 몇 달 후 결혼하는 커플이다.
사촌동생에게 여동생이 있는데(역시 내 사촌이지...) “아가씨”라는 표현이 거북해 다른 표현이 없는지 묻는 거였다. 물론 둘이 대략 찾아보거나 머리를 1분 정도 맞대 본적을 있을 거다. 아가씨라는 표현 말고는 없으니, 나에게 물었겠지. 대략 띠동갑 정도 나이 많은 저 언니는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저 질문을 밥 먹는 자리에서 물어볼까 말까 얼마나 망설였을까 싶기도 하고, 또 얼마나 아가씨라는 표현이 싫었으면 헤어지기 전 황급히 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내가 미안했다. (물론 그냥 그때 떠올라 입 밖으로 꺼냈을지도 모르지만)
딱 10년 전, 내가 고민했던 포인트다.
아가씨
원래는 양반가의 미혼 여식을 부르는 말이었고 이제 가족관계에서는 시누이를 부르는 말이 됐다. 남자의 경우는 도련님이다.
반대로 ‘아가씨’가 오빠의 부인을 부르는 말은 “새언니”다. 양반가의 여식 대접을 해줬으면 이쪽으로도 양반가의 여식 또는 며느님 호칭이 맞붙어 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새언니의 새가... ‘굴러들어 온’을 뜻하는 것 같아 몹시 거북했다. 그냥 아가씨라는 호칭 자체가 싫어서 트집 잡은 거기도 하다. 그 정도로 호칭이 싫었으나,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썼다. 속으로는 듣는 사람이 더 거북할 텐데, 누가 말려주겠지...라는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듣는 아가씨도 마다하지 않았고 양가 어른들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대신 꼭 불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소리 냈을 뿐.
00이야~
문제는 신혼 초에 불거졌다. 내 동생은 나보다 열 살이 어리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편에게는 아주 어린 처남이 생긴 거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방심을 했다. 처남이라는 호칭 대신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는 거다. 생각해보면 내 동생 초등학생일 때 처음 봤는데 초등학생한테 처남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물론 그땐 결혼하게 될 줄도 몰랐다. 7년을 이름 부르던 사이인데 결혼을 했더니 그 호칭이 걸리는 거다. 처남이 아니라 이름을 부른다고 지금? 나는 아가씨라고 하는데? 늬가??
그렇게 남편과 나는 남편들이 싫어한다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오빠, 할 말이 있어”
이미 남편의 손은 벌써 공손모드에 들어갔다.
“나 이제 아가씨 말고 ㅁㅁ야라고 해도 돼?”
“야, 그건 안되지”
“왜 안돼?”
“어른들이 뭐라 그러겠어”
이쯤 하면 눈치를 채야하는데 참 해맑았다 이 남자.
(난 10년이 지난 일을 아직도 어제처럼 기억한다. 이게 더 대단해)
“그럼 오빠는 내 동생을 뭐라고 부르지?”
“00이.. 아... 처남이라고 부를게. 미안해”
그 후로 지금까지 남편은 처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도 아가씨라는 호칭에 점차 적응할 수 있었다. 단, 아가씨가 없는 자리에서 지칭을 할 때나 제삼자와 얘기할 땐 꼭 시누이라고 했다. 당시 시누이는 아가씨인데 처남은 처남인 것도 억울했다. (별게 다... 참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땐 그런 게 중요하다 싶을 정도로 뭔가 억울함이 많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가씨의 호칭은 또 한 번 바뀌었다. ‘고모’로. 그제야 나는 왜 우리 엄마, 큰엄마가 꼭 ‘고모’나 ‘시누’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게 됐다. 딱히 못할 건 아닌데 편치 않던 발음을 아주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바꿀 기회였으니까.
서방님, 아주머니
시월드와 처월드의 호칭 문제는 아가씨와 처남에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두둥... 시누이가 결혼하면서 또 한 번의 문제가 생겼다. 시누이의 남편을 내가... 세상에... 서방님으로 불러야 한단 거다.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단번에 이건 못한다 결정했다. 시매부, 또는 남편이 불러야 하는 매제라는 표현을 나도 같이 쓰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시매부가 나를 부를 말이 없는 거다. “아주머니”라니... 와... 명치끝에서 약간의 욕이 올라왔던 것 같다. 대상이 없는.
아주 잠깐 넷이서 이 문제를 1~2분 간 얘기 했던 적이 있는데, 결국... 매제는 나를 부르지 않는다. 솔직히... 호칭뿐만 아니고 아예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이 사실을 나는 지금 알았다. 별로 중요치는 않다만)
이름으로 불러요
결국 나는 사촌동생의 예비신부에게 아무런 해결책을 알려주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다. 작년 추석 즈음 어느 단체에서 성차별적 호칭 대신, “~~ 씨, ~~ 님”이라고 이름을 부르자고 제안한다는 기사를 봤다는 걸. 또 어느 해인가는 국립국어원이 가족 호칭 정비안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시가댁 처갓집이 아니라 시가, 처가로. 도련님 아가씨 대신 이름으로 부르자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사촌동생과 예비신부는 그걸 찾아보지 않았을까? 절대 그럴 리 없는 아이들이다. 얼마나 서칭에 능하고 꼼꼼한데 이걸 모를 리가... 아차, 내가 먼저 그냥 이름 불러~ 라거나 친척 어른들께 분위기를 잡아 주길 원하는 거였구나!(이런 눈치 없는 시월드 언니여)
내가 나름 우리 집안에서는 오피니언 리더다. 정말 유교, 성리학적인 요소들 다 짬뽕시켜 놓은 보수적 분위기에 정만 가득한 집안 어르신들이 명절 때마다 함께 한다. 그 속에서 어릴 때부터 “왜 여자는 제사 때 절 안 해요? 나도 할래!”라고 생떼 부리거나 “왜 남자상 여자상 구분해, 나도 아빠 옆에서 밥 먹을 거야”했던 게 나라서, 우리 친지들은 웬만하면 난 안 건든다. 듣고 보면 내 말이 맞거든. 어린 조카 이뻐했던 삼촌들은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려 했고, 큰엄마나 작은 엄마들은 내 말을 통해 약간의 대리만족을 느꼈고, 할머니의 심중을 떠보는 창구로 활용했다.
아무튼, 사촌동생 커플의 의도가 그것이든 그냥 별생각 없는 질문이었든 곧 다가올 그들의 예식장과 매번 명절이 평온하려면 이번 설에는 성리학자님들 모시고 새로 규정된 호칭 가이드라인을 단단히 알려드려야겠다. 이제 집안에서 아가씨, 처남, 처제는 없다고. 우리 모두 스타트업 크루가 되자고. 00님, 00님. 집안에서 아주 재밌겠다. 카카오크루가 되는 것보단 어른들에게 나은 선택지겠지. 제이슨, 미셀, 카렌보다 훨씬 나을 거다. 본명은 유지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