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죽음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 번 삶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의 무게에 짖눌려 숨이 막혔다. 삶은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더 무겁게, 더 무겁게 나를 짖눌렀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죽지는 못하는 상황. 삶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 할 필요가 있었다.
삶을 무겁게 하는 건 나의 생각들이었다. 나의 욕망이 자아낸 생각, 그것들... 삶은 그것들을 먹고서 몸집을 불린 것이다. 그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만한 '생각'들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렸다.
죽음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을 참 오랫동안 슬퍼했다. 억울했다. 나의 마지막 생존 본능이 미웠고, 살고자 했던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 혐오스러웠다. 그것들은 삶과 같은 편 같았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생존시킨' 것 같았다.
더이상 슬프지 않다. 억울하지도 않다. 가끔 아쉽지만 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패스트푸드다. 먹고 살이 찌는데 건강하지 않은 그런 것. 더불어 삶을 무겁게 하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놓으려 한다. 그러려면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 날 것 그대로의 나.
혐오스러웠다. 역겨웠다. 겉으로 드러난 나보다 더 추하고 못났다. 그것이 '나'를 마주한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나는 그런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들이 뱉어대는 생각들을 차분히 마주한다.
생각들은 꽃처럼 피었다가 시들고 진다. 하지만 계속해 물을 주면 나무처럼 울창해지고 마음 깊이 뿌리를 박는다. 꽃처럼 피어오른 생각에 물을 주지 않으려 한다. 나도 모르게 물을 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지만, 그러면 최대한 빨리 그 행동을 멈추려고 노력한다.
생각을 나의 통제 하에 둘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에 물을 줄지, 그저 그것이 시들고 지는 모습을 바라볼지는 결정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노하우들을 터득해가고 있다. 어쩌면 죽음은 이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나를 꼬드겼는지도 모른다.
죽음 끝에서 삶을 마주한다.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삶이 이따금 한없이 가벼운 민들레씨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내 마음에 뿌리내린 악몽같은 생각들도 때가되면 시들고 질 것을 기대하며,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