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달릴 힘을 잃었다.
참 어리석게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내가 연봉 협상에서 제외될 줄은.
'오만했나?' '내가 일을 잘 못했나?'
말 그대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 거렸다.
전자계약서가 도착했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계약서나 월급명세서를 꼼꼼히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만은, 내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스크롤,
또 스크롤.
그해는 유난히 외주 협업이 많았기에 수십 건의 계약서를 넘겨야 했다.
일러스트, 촬영, 교정자..
문서들 사이를 헤집듯 지나, 드디어 찾았다.
나의 연봉 계약서.
작년 것.
그리고 올해 것.
동일했다.
소수점 하나 다르지 않았다.
연봉 동결.
회사 생활 9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잠깐, 멍해졌다.
'아... 나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서러움, 화, 수치심...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보다 더 아팠던 건,
아무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
나는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팀장님, 저 연봉 동결인 거 아셨어요?
"응..."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매년 사전 면담하셨잖아요. 이번에는 말씀도 없으셔서..."
"미안해. 열심히 한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
"혹시 제가 회사에 필요 없는 사람이면, 지금이라도 그만둘게요."
"그런 거 아니야. 풀타임이든 단축근무든, 함께하는 게 중요하지."
정확한 사유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은 듣지 못했다. 다만, 건너 건너, 단축근무자는 연봉 인상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게 진실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회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처럼 워킹맘이지만, 풀타임으로 일하는 동료들도 많다. 어쩌면 나는 회사의 니즈에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편도 회사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처음에는 납득이 되기도 했다. 내 단축근무로 인해 회의 일정을 조정하거나, 교육 스케줄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 성과가 미비했던 다른 책임자는 소폭이지만 연봉이 인상되었으며, 성과급 대상에도 리스트가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 다잡았던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응어리가 자라났다.
'성과보다 풀타임 근무가 더 중요한 걸까?'
'나는 단축근무를 하는 한, 내 연봉은 계속 동결일까?'
'이런 마음으로 프로젝트 리딩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벅찼던 지난 1년이 억울했다.
처음으로 세 팀을 동시에 이끌게 되었다. 업무의 무게를 가늠하며 우선순위를 세워야 했다. 아이디어가 돋보여야 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젝트는 그 업무에 가장 적합한 선임을 중심으로 팀을 꾸렸다. 과도한 개입은 팀장의 역량을 제한하고, 팀의 창의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함께 논의했지만, 그 외에는 팀장이 주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팀장은 잘 해냈고, 나는 나머지 두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당장 회사의 주력 사업은 아니었지만, 두 프로젝트 모두 장기적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험이 부족한 팀원들과 함께하면서 작은 성과부터 만들어내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체계를 세웠고, 실제로 점차 결과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근하고 아이에게 집중할걸...
점심시간에도, 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아이를 재운 뒤에도, 회사에서의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노력했던 내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근하고 아이랑 더 많이 놀걸'
아이 픽업을 맡은 날이면 일찍 퇴근했기에, 그 이후에도 업무 전화는 계속됐다. 팀원들에게는 '언제든 전화해도 된다'라고 했다. 고맙게도 팀원들은 내 상황을 이해해 줬고, 어지간한 일은 자제해 줬다. 하지만 외주 전화는 달랐다. 새로운 업무 특성상, 언제 어디에서 전화가 올지 알 수 없었다. 아이도 그것을 잘 알기에, 내 전화기가 울리면 묻는다.
"엄마, 회사 이모야?"
아이에게 '회사 이모'는 업무로 인해 전화를 걸어오는 모든 어른들이었다. 그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연봉 계약서 앞에서 무력했다. 나는, 그렇게 연봉 협상에서 조용히 제외됐다.
사진: Unsplash의Cody Eng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