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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Jul 24. 2023

전기는 기만이다

하지만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는 한 사람당 책 2권을 고르면 한 달에 한 권씩 읽고 발표하고 토론한다. 이번 달의 책은 내가 고른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다. 당연히 발표는 내가 맡았다. 그런데 거기서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책에 묘사된 문단이 스타 작가를 만드는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한 사람을 콕 집어 저 높이까지 띄워놓고 거기서 발생하는 관심과 이익을 나눠 먹은 다음, 희소성과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자리에 올려놓을 다른 작가를 찾아 나선다. 각종 파티에 출석하고 문학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우승마에 베팅하는 바턴 트래퍼드 부인은 그야말로 작가 사냥꾼이다. 거장 후보에 오를 작가 목록의 잉크가 가만히 마르게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의 손에 의해 유명 작가로 거듭난 에드워드 드리필드는 어떤 남자로 바닥을 닦고 그를 계단 위로 질질, 아래로 질질, 그다음엔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는 가사의 곡을 자주 불렀다. 문단, 혹은 그 업계의 설계자에게 작가는 맛 좋은 고기다. 물렁한 비곗덩어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나면, 단단해서 씹어먹을 수 없는 뼈는 철저히 외면받고 버려진다. 이것이 과연 작가 개인이 살아남고 싶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일까?


몸은 실존 인물들을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들로 문단의 내막을 폭로했고, 책은 출간되자마자 파장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서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전기를 집필하기로 한 작가 앨로이 키어는 묘사에 따르면 진실한 이야기보다 재밌는 이야기, 그래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적나라한 평가로도 몸의 ‘문단 흠집 내기 작전’은 실패했다. 앨로이 키어의 실제 모델인 휴 월폴은 책의 출간을 막으려 했을 만큼 자신을 겨냥한 공격이었음을 알아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타격 없이 출간 7년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문학계의 폐해는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걸 보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판을 뒤집는 작품들이 등장할 때의 충격과 떠들썩함에 커튼 뒤의 잡음이 가려졌을 뿐이다. 세상의 부조리는 여전히 그대로고, 몸은 20년 지기 친구를 잃으면서 인간관계를 망친 것으로 끝이 났다.


<케이크와 맥주>는 작가가 직접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언급한 <인간의 굴레에서>의 연장선과 같은 작품이다. 전작에서 문학을 좋아했지만 작가는 아니었던 필립 캐리는 <케이크와 맥주>에서 이미 50대의 원숙기 작가인 윌리엄 어셴든으로 변신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서머싯 몸은 후자에서 더 가깝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작품 밖의 상황까지 함께 본다면 이 작품은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인간의 굴레에서> 못지않게 사적이고 내면적인 이야기다. 유미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를 쫓는 그의 취향과 에드워드 드리필드로 치환되는 토마스 하디에 대한 평가, 자신의 전기가 쓰이지 않기를 바라 서류와 편지를 불태웠던 일화 등 작품을 둘러싼 뒷이야기들이 몸 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단에 대한 비판은 쾌락과 유희를 예찬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는 표면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 우리에게 케이크와 맥주를 대접해줬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고 취할 일만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실컷 먹고 마시고 잠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때 전날의 케이크와 맥주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곱씹어야 한다. 그게 문학의 확장이다. 나는 주인공인 어셴든이 아주 열렬히 사랑했던 로지에 대한 찬미가 모두 지나간 다음, 즉 마지막 장까지 읽고 책을 덮은 뒤에 곱씹어본 결과, 몸은 케이크와 맥주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락과 유희를 강조하고자 했지만 드러난 진실은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영어 관용구에서 ‘좋은 것’을 의미하고 작품 내에서는 쾌락과 유희를 의미하는 케이크와 맥주, 그리고 그것의 의인화인 로지 드리필드의 이야기에서 한 겹 벗겨보면, 문단을 비판하고 위대한 작가의 조건을 읊는 화자가 보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케이크의 생크림과 맥주의 거품을 끈질기게 걷어내면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잔인한 서머싯 몸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은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말했던 조앤 디디온의 말을 증명하기에 최적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용이 충격적일수록 작가에게 관심이 쏠린다. 실제 모델로 지목되어 모욕감을 느낀 사람이 작가에게 행하는 압력과 그에 대한 이차적 반응이 궁금해진다. 종이 위에 남아 있는 글자는 더 이상 없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은 본능적인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제안한 이유도 거기 있다.


몸은 전기를 쓸 때 의도적인 편집을 거치며 맹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그의 뜻과는 다르게 오히려 몸의 전기를 써서 더 큰 모순을 생산하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든다. 죽어서 더 이상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화가의 가치가 더욱 상승하듯이, 작가의 죽음은 도구화되고 상업화된다. 사실은 문단을 넘어선 자본주의가 창작자라는 맛 좋은 고기를 더 많이, 더 자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 아닐까?


몸은 전기 집필에 대한 의견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순간 자신도 제물이 될 것이라는 걸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생활이 파헤쳐지고 함부로 평가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남긴 기록과 편지들을 불태웠다. 그런 위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이 주제를 택한 이유는 스스로 그런 불상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죽는 순간 불리해진다. 몸이 91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해도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유한함이 참 안타깝다.


작가의 자기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해석도 통제할 수 없다. 글은 공개되는 순간부터 공공재가 된다. 따라서 손에서 완전히 떠나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완벽하게 이해받고 싶다는 건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이러한 한계 앞에서 전기가 작가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해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주기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일정한 시간에 따라 변하는 가치와 의미들을 같은 대상에 매번 새롭게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그만큼의 꾸준한 관심과 정성을 필요로 할 만큼 충분히 사랑받는 작가여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영광이 주어질까? 바람직한 작가의 모습이란 건 실체가 없다.


휘황찬란한 플롯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는 작가의 삶이다. 작가의 삶은 이 작품에 의하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죽은 작가인 에드워드 드리필드와 출세욕이 강한 작가인 앨로이 키어, 그리고 원숙기 작가인 윌리엄 어셴든이다. 죽은 작가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 출세욕이 강한 작가에게 성공은 있지만 명예는 없다. 그는 죽음으로써 명성이 사그라든다. 마지막으로 원숙기 작가는 이제야 문학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이들은 서로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죽어서 가치가 상승하든 매력이 떨어지든, 우리의 불멸의 관심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은 생태계 안에 있는 셈이다.


전기는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바탕으로 하고, 작가가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담겨 있지 않다. 실제 모습을 똑같이 그린 초상화보다는 생전의 업적과 명성이 덧씌워진 일종의 상상화가 된다. 그래서 전기는 기본적으로 기만이다. 하지만 인간은 집필을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감춰도 다 들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보여줘도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는 법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기만이든 모순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렇다고 거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인물과 직접 만나지 않은 채 전기를 읽을 때 가장 큰 목적은 단순히 시간과 체력을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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