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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Oct 02. 2023

너무 전지적이거나, 너무 국지적이거나

동시대 문학의 한계

어떤 한국 현대소설을 읽었다. 초반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었다. 예의상 펼쳐지는 전개와 지나치게 친절한 문장들이 뒷담화와 처세술로 가득한 삼류 잡지 속의 지나가는 글과도 같았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역으로 과거의 나에게 가하는 공격이다. 책을 읽는 동안 고등학교 문예 대회에서 아무도 출품하지 않는 시나리오 부문을 공략하면 수상 확률이 높다는 점에 혹해 급조했던 글이 계속 떠올랐다. 도시의 잔인함이 싫어 따뜻해 보이는 시골로 떠난 젊은 여성이 더욱 지독한 이기주의를 맛보고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다. 구성이 허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대로 상을 받기는 했으나, 조잡하게 흉내 냈던 현실은 어떠한 호소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에서 느낀 기시감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문제만 있고 결론이 없는 글은 무책임한 조물주가 내다 버린 부스러기다. 직접 만든 세계를 갈등으로 꽉 채워놨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 세계의 매듭을 지어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전지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점은 다 안다는 듯이 굴지만, 사실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겉만 핥는다. 그리고 웬만한 완성도로는 이야기 자체가 외면받기 쉽기 때문에 세계의 틀을 짜는 것에 급급하고, 현실만큼 정교한 개연성과 설득력을 뒤쫓느라 정작 그보다 한 발 앞서나가거나 넓게 퍼져나가지는 못한다. 일단 되는 대로 펼쳐놓은 장황함과 넘치는 정보들 속에 생각은 묻히고, 인물들은 오로지 표상으로만 남는다. 그런 독서의 연장선이라고 해봤자 가상 인물과 실제 인물을 대조해 보는 놀이에 그친다. 일껏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 결과물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복사해 온 장면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글을 쓴 사람의 자원뿐만 아니라 지구의 자원까지 무분별하게 끌어다 쓴다. 다 알 만한 것들이고 이미 느껴본 것들인데 확장된 경험과 철학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모든 서사가 뒷담화만으로 만족하고, 소모적인 말싸움이 온 신경을 독차지한다. 현대에 이르러 이미 넓은 세계가 가상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광활해지면서 안타깝게도 헛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걸러지지 않는 데다가 돈의 논리가 끼어들어 난잡해진 와중에 착실히 제자리를 지키는 어조가 묘하게 수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면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이 협소한 일상에 매여 있다. 어쩌면 시대나 세계에 대한 혜안보다 일상에서의 해답을 더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지금의 사회 구조가 바꾸기 힘들 만큼 견고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많은 변수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과거보다는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는 체제가 오히려 변화에 적대적이다. 세상이 뒤집히지 않도록 버티고 서 있는 기둥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마치 같은 공동주택에 사는 이웃들이 모두 같은 이상을 그리지는 않는 것처럼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성의 재현밖에 없다. 희망과 불만, 확신과 불안이 어지럽고 지저분하게 뒤섞여 있는 혼돈 속에서 대책 없이 생명 하나에만 의지한다(아마 이러한 경향은 역사가 쌓일수록 점점 짙어질 것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해야 하는 모두가 똑같이 겪는 증상이다. 이때 ‘동시대를 사는 것’의 의미는 익숙하고 생생한 역겨움과 절망을 어떻게든 뚫고 나아가는 것, 숨 쉴 듯 찾아오는 권태를 맨손으로 부수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대 인간의 모습이고, 가장 흔한 현실의 모습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드러나지 않는 양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법인데. 단순한 흉내내기는 특별한 능력 없이도 할 수 있고, 따라서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구상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만큼 활자의 세계 또한 어지럽고 지저분하게 뒤섞인 혼돈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떻게 살 길을 찾아야 할까? 뻔히 보이는 현실이라도 한 번 더 보여줌으로써 강조하는 게 답일까, 아니면 전혀 보이지 않는 진실을 표현하는 게 답일까? 난 문득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의 정의가 궁금해졌다. 다소 빈약한 조사를 거친 결과,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현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달랐지만 전부 납득이 될 만큼 현실이란 다채로운 개념이다. 때문에 각자의 현실이 있는 법이니 다들 알아서 뚫고 나갈 길을 찾으면 된다는 속 편한 결론에 이를 뻔했다. 그러나 동시대 문학이 시간이라는 한계(혹은 시의성이라는 유혹)를 뛰어넘어 두고두고 회자될 작품성을 얻기 위해서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불편한 기시감을 느꼈던 소설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취’라는 표현이 나온다. 등장인물은 선명한 현실이 그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냄새는 잠깐 등장했다가 공기 속에 섞이고 바람이 불면서 금방 사라진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더러운 것을 즐기는 취미가 있지 않은 이상 자리를 뜨거나 코를 틀어막는 것으로 상황은 쉽게 끝이 난다. 반면에 가장 위협적인 현실은 무색무취하다.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비하거나 대처할 기회도 놓친 채 잠식되다가 숨이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깨달을 텐데, 그때 가서는 회복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되물을 수도 없다. 결국 어떠한 감각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고통을 형상화하는 일이 문학의 중요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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