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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Oct 09. 2023

넓은 거실과 삼일천하

급박한 여행 일정 때문에 아침 일찍 빠르게 쓸려나간 부모님과 손님들의 공간까지 일시적이지만 3일 동안은 전부 내 것이다. 난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장 농축된 고독을 즐겨야 한다. 나 또한 급박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이때 주어진 과제는 어느 날 갑자기 독차지하게 된 이 넓은 거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다. 혼자 있으니 할 일도 많고 눈 둬야 할 곳도 많다. 그러다 극단적으로는 작은 살림살이 하나까지 각을 맞춰 정렬하고, 물방울과 얼룩도 남김없이 모조리 닦아낸다. 하지만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자유가 주는 희열이 있다. 난 도저히 공감대를 이루기 힘들어 보이는 난해한 재즈 음악을 거실에 전부 울리도록 크게 틀어놓았다. 혼자 있을 땐 이런 취미를 즐기면서도 둘 이상 모이면 전형적인 즐거움을 위해 스스로 광대가 되곤 한다.


거실을 정복하기 전날 밤에 좁은 방에서 엿들었던 대화에서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술이라고는 고기 잡내를 빼는 데만 사용하는 이 집에서 21년 묵은 묵직한 스카치 위스키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시계를 볼 틈도 없이 이어지던 시끄러운 웃음소리들이 주로 자정 전에 잠드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대화 주제의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발언과 상호 작용은 끊이지 않았으나, 내용을 압축하면 ‘죽느냐 사느냐’, 혹은 ‘돈이냐 아니냐’였다. 구성원들은 혼자 있을 때 분명히 저마다 다른 취향을 추구할 텐데, 다 같이 모이면 놀랍도록 단조로운 말들만 주고받았다. 사실 그런 대화는 마냥 단조롭다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을 만큼 모호하면서도 묵직한 면이 있다. 그러고 보면 파편화된 관심들이 한 곳에 모이려면 얼마나 큰 주제가 필요한 것인가?


지금 이 시점에 책을 붙들어야 유지되는 삶은 고단하다. 한 글자라도 눈에 담으려고 시간을 빼고 체력을 비축하는 일에는 강도 높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와중에 가끔 세상의 염증과 인간의 존재가 혐오스러울 때가 있는데, 사실은 소음을 걸러 듣지 못한 내게 과실이 있다. 언제는, 누구한테는 그런 방해 공작이 없었을까? 그런데 그 방해 공작이 원천 차단되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다. 도덕과 지식을 익힌 뒤에는 충격과 기백을 다룰 차례다. 난 자연조차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넓은 거실은 훌륭한 실험장이 될 예정이었다.


부엌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때 전식과 본식, 후식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대접하고 남은 음식으로 사흘을 때웠다(삼일천하의 식사란 이런 것이다). 요리라고 해봤자 저녁을 대신할 고구마를 찌는 일 정도였다. 대충 다 먹고 나면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한 번도 TV를 켜지 않은 거실은 큰 전자 기기에서 나오는 열조차 돌지 않아 썰렁했다. 그래서 보일러 온도를 1도 높게 설정하고는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때 간헐적인 함성이 아파트 단지 내에 울리고 인터넷에는 아시안게임과 관련된 기분 좋고 짜릿한 소식들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 순간에 동참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도 스포츠도 누군가와 공유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그걸 알기에 오로지 혼자서만 즐기고 간직할 만한 일은 폭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없다.


전날 밤의 두 가지 화두 중 하나였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지금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당신과 나 사이에서는 이미 지나친 듯하다. 대신 이제 눈앞에는 ‘돈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돈이 가치 평가를 대신하는 세상에서는 수익이 없으면 성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풀리지 않는 문제의 원인은 자신의 능력에 있다며 비난받거나 스스로 비관하는 길로 빠지기 쉽다. 이 악랄한 연결고리가 시야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즉, 자의식을 잘게 부수고 해부하는 데만 목적을 두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넓은 거실도 결국 하나의 좁은 세계다. 이곳에 한때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곧 자유를 뺏길 거라는 생각에 초조해하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칫 적막 속에서 영원히 할 말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내가 여자로서 돈을 벌려면 자본주의와 페미니즘을 외면할 수 없듯이, 변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탐색하고 의식을 키워나가지 않을 수 없다.


글에도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다. 반사된 상을 보며 직접 설계하고 구성한 모든 부분을 점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분리된 자아가 보기에도 흡족한 결과물, 그리고 적절함을 넘어 명료함을 쟁취하길 원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싶어도 그 시선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을 믿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바지 주머니 깊숙이 신분증을 찔러 넣은 채 누빌 수 있는 세상의 영역이 넓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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