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종 세력도 극단적 신념도 없는 지금이 뒤를 돌아보기에 적기다. 얼마 전에 내면에 도사리는 독재자의 싹을 뒤늦게 발견하고 나서 지금까지 마음이 심란하다. 지나친 통제 성향이 일상생활과 가족들에만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다. 범죄자나 독재자보다는 불효녀가 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인다. 그런 자기 합리화가 진행되는 한편, 이 핵가족은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죄와 죄책감은 평생 날 따라다녔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르면 주로 악의 편에 속해서 발음이 어눌한 친구를 무리에서 쫓아내거나 길거리에서 천 원짜리 병아리를 샀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당일에 그 병아리를 집 밖에 버렸었고, 물건을 훔친 적도 있다. 그 밖의 자잘한 잘못들은 기억도 나지 않게 많을 것이다. 그렇게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신나게 찬송가를 부르고 평일에는 악마가 되곤 했다. 그러다 머리가 커지니 내가 저지른 죄들이 도로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심판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죄 사함을 받을 길은 두 가지였다. 존재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죗값만큼 정의에 헌신하거나. 이기적이게도 인정 욕구와 지배욕 때문에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죄책감을 털고 정의롭게 사람들을 이끌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열등감이 발목을 붙잡았다. 위대한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보통 사람이라는 열등감이었다.
악마는 아웃사이더다. 올바른 강자의 힘도 가지지 못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죄책감과 열등감이 합쳐진 절망감이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어떤 음성이 머릿속에 둥둥 울린다. ‘넌 네가 원하는 그 무엇도 할 자격과 능력이 없어.’ 결국 반강제로 다다른 목적지는 몸집 크고 까탈스러운 가축의 시선이었다. 밭을 갈지 않고 여물만 축내면서 반찬 투정을 하는 가축이랄까?
악이나 강박, 완벽주의… 이런 것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최선은 이롭거나 피해를 덜 끼치는 방향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서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도덕을 하나씩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시지프스처럼 늘 허탈하게 원점으로 돌아오더라도 평생 온 힘을 다해 수행해야 할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내가 저지른 악이나 불평등을 좌시하는 방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복한 가정의 고약하고 오만한 자식이 실패하고 패배하는 비극의 한 유형을 학습한 결과다.
요즘 지독하게 붙잡고 늘어진 비판 이론은 “모든 것은 패배에서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철학에 끌리기 마련이다. 아직 공부하고 배우고 깨달은 바가 많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이론들을 하나씩 접해보니, 완벽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에서 부족함을 느끼며 점점 최신의 주장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반성의 흐름이 역사의 흐름과 맞아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철학이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가야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무언가라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내게 꼬리표는 존재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반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했다. 그것을 구원이라 부르긴 뭣하지만 나의 과거와 현재를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얼핏 한 줄기의 빛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여 더 큰 부담이 된 희망을 비관이 날려준다. 가슴속은 공허해지고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칼바람이 부는데, 그 편이 가벼워서 좋다. 그림자를 애써 무시하고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서다.
나의 태도는 점점 비관주의로 기울었다. 즐겁지 않은 것들만 바라보는 삶에 도저히 낙관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도대체 낙관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궁금해졌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낙관주의 얘기만 하는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 철학자 팡글로스는 그의 제자이자 순진한 청년인 캉디드에게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캉디드는 스승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초반에는 어떤 면에서 굉장히 수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그를 갖은 고통에도 좌절하지 않게 돕긴 하지만, 고통이 남긴 교훈을 얻은 캉디드는 세상이 늘 최선의 형태라는 팡글로스의 철학을 의심한다. 그러다 여행 중에 비관주의자의 전형인 ‘불쌍한 학자’ 마르틴을 만났을 땐 거의 모든 주제에서 의견이 충돌한다. 하지만 왜인지 둘은 서로를 떠나지 않고, 캉디드가 고단한 방랑 생활 끝에 정착한 곳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함께 산다. 어쩌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일정 농도로 섞여야 양쪽 다 건강하고 완전해지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끝에서 결국 낙관주의를 버린 팡글로스처럼 근거 없는 낙관은 아주 약한 바람에도 금세 꺾이고, 최선이 아닌 최악을 만날 때 우리는 그보다 나은 것을 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난 그동안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테리 이글턴의 “비극은 희망을 거래하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한 문장이 나의 오해를 깨부쉈다.
언젠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었을 때 곧바로 포스트잇에 옮겨적어 벽에 붙여둔 문장이 있다. “끔찍함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황폐함 속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내 상황에 적용하기엔 부적절하지만, 도덕을 세우기 위해 현실을 탐색할 때 기억해야 할 문장들이다. 이것들은 어떤 위험성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고, 즉각적이고 안일한 반응으로써 특정 문제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또 라즈미그 쾨셰양의 책 <사상의 좌반구>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곳에 새로운 관념이 출현”한다고 했던 것처럼 불쾌한 감성을 이론화할 수도 있다. 이때 같은 책에서 “이론화한다는 것은 공포에 떨게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론이 공포를 무기처럼 휘두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공포의 존재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불현듯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을 착취하는 농장의 현실을 가장 먼저 문제 삼고 ‘동물주의’를 제창한 고령의 수컷 돼지 메이저가 떠오른다. 그는 인간에게는 공포를, 동물에게는 영감을 준다. 만약 <동물농장>의 플롯이 현실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캐릭터의 출현도 감히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면, 즉 공포든 영감이든 묵직하게 꽂으려면 시간 감각도 예민하게 깨워야 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실이 하나의 원리”라 했고, 마르크스는 “추상이 개인들을 지배한다.”라고 했다. 어렵겠지만 답이 없어 보이는 현실의 원리와 그것을 휘감은 추상을 인식할 수 있다면 비극의 결말 뒤에도 희망이 피어오른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한 번도 전원을 끄지 못하고 접속해 있는 이 게임은 손이든 머리든 뭐든 민첩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실패나 패배도 대략 백만 개의 목숨 중 하나가 깨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쉽다. 정반대의 두 개념,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를 동시에 마음에 품는 것이 아수라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기괴한 두 얼굴의 모습을 연상시키지만, 볼테르는 고통 속에서 행운과도 같은 희망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데 활용하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