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일종의 연말 결산이다. 작년 12월 말에 오로지 독서모임을 위한 독서를 시작하고 지난 1년간 내 의식의 흐름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365일을 빈틈없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일단 개인적인 독서와 달리 이건 근본적으로 답을 찾기 위한 독서가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 내 문제가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완독하고 나면 이상하게 어디선가 튀어나온 답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런 깜짝 선물이 말이 되는 이유는 내가 집중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도 집중하고, 내가 읽은 것이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날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대화와 토론이 약속되어 있고 그 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는 공허함을 매달 빼놓지 않고 깨부수는 교류는 내년 초에 3개월 동안 잠시 쉬어갈 예정이다. 난 벌써 그 공백이 걱정이다.
난 집요하게 변화를 추구한다. 내가 무언가에 몰입한다면, 그건 변화를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른 책으로 첫 달을 시작한 건 행운이었다. 발표를 위해 작년 12월 22일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기 시작했다. 내 성정에 가장 잘 맞는 글의 형식을 한창 연구하고 있었을 때, 이론과 문학의 훌륭한 결합이 적절하게 눈앞에 떨어졌다. 1929년에 출간된 고전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슬프고도 세련됐다. 변화는 정말 더디게 이루어지는데, 적어도 생각만큼은 한참 앞을 내달릴 수 있다는 점과 순수문학으로도 이런 선언이 가능하다는 점이 내 세상을 차츰 깨웠다.
한껏 고취된 의식은 바로 한 달 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만나면서 완전히 뒤집혔다. 비유하자면 땅 쪽에 얼굴을 대고 깊은 흙의 향기를 들이마시다가 대뜸 몸 전체를 뒤집어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태양을 마주 보는 기분이었다. 이론과 문학의 결합을 넘어 정치와 예술의 결합이라니, 처음에는 그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긴가민가했다. 정치와 예술이 각자의 영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정치가 지나치게 예술적일 때와 예술이 지나치게 정치적일 때라고 굳게 믿어왔건만, 이런 신선한 뒤통수 때리기라니. 울타리를 개방하다 못해 죄다 철거한 나는 점점 철학과 문학의 결합을 꿈꾸고 있었다.
그동안 날 스쳐 갔던, 그중에서도 몇몇은 가슴속에 뿌리 내린 고통을 자유를 얻을 기회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극한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위해 실존주의자들의 주장과 그들 간의 교류, 대립을 600쪽짜리 묵직한 한 권에 다룬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을 집으로 들였다. 그리고 4월과 5월에 연달아 읽은 마이크 브라운의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각각 에세이에 대한 자신감과 어린 시절 할 일이 없으면 괜히 뒤적거리곤 했던 셰익스피어 희곡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분류는 애매하지만 비교적 긴 글 하나가 그 책들의 결과물이 되었고, 드디어 나 자신을 작가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책을 대하는 시점이 평범한 독자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은 동료로 바뀌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오스카 와일드가 추상적인 서사와 묘사를 통해 드러낸 도리언 그레이의 썩어빠진 초상화였다. 아니, 사실은 나의 썩어빠진 초상화였다. 더러운 내면을 까발리면서 그 위에 유미주의 정신을 덧칠해 역겨움을 꽤 볼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남겼다. 그 어둠을 감추어 자멸할 것이냐, 아니면 숨기지 않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승화시켜 균형을 이룰 것이냐. 난 후자를 택했다.
여름이 막 포문을 열었을 때 한 권의 책은 잠시 덮어둔 채 더 많은 책에 압도당하기를 자처하고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갔다. 실상은 책보다 인파에 질식할 것 같았지만, 책을 좋아하고 심지어 책을 위해 몸을 움직이고 기꺼이 돈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한 무리의 인간들은 그 무리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한 사람을 배출할 힘이 있는 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하반기에 접어들며 다방면으로 탄력을 받은 상태에서 벌써 두 번째 발표 차례가 다가왔다. 작가와 문단, 실존 인물과 현실 비판이라는 키워드 모두를 껴안은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는 다른 일 없이 오직 글만 쓰는 작가의 관점에서 사회 비판을 감히 상상하게 했다. 꼭 최신 이슈가 아니더라도 작가는 어떤 종류의 진실이든 발굴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난생처음으로 책 제목과 관련된 관용구의 기원을 찾아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읽거나, 전작 <인간의 굴레에서>가 주인공 윌리엄 어셴든의 과거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을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빠르게 읽어냈다. 독서의 효과와 범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책 한 권을 깊이 분석하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고등학생 때 목차만 보고 대충 감상을 지어냈던 서평이 실제로 수상으로 이어졌던 건 그저 어린 날의 꼼수에 불과했고, 최근 쓴 글이 ‘진짜’였다.
첫 시도가 성공하자 두 번째 결과물은 더 쉽게 발전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 저자와 나의 상황을 비교하고 각자의 아버지와 신념에 관해 생각하면서 회의주의와 진보주의를 마침내 제대로 만났다. 책이 남긴 의문을 비슷한 시기에 봤던 영화 <바비>를 통해 해소하며 책의 내용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자’라는 다짐을 새긴 채 10월에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을 접했을 땐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런 게 페미니즘인가?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과연 해결책일까? 첫 문장에서부터 실패를 암시했던 허술하고 무책임한 제도가 결국 알 만한 결말을 맞는 것이 각성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때 독서모임, 특히 발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 또한 돌봄을 필요로 하고 그것에 의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기 돌봄의 윤리’와 한 개인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는 ‘교차성’ 이론이 소설이 생략한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이 이 모임의 주된 힘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내 의식은 꽤 정확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나아가야 앞으로 나아가는 걸까 하는 고민이 정치철학을 알고 싶은 마음에 도달했고, 도서전에서 아주 잠깐 스쳤지만 뇌리에 콕 박힌 ‘철학적 대전환’이라는 키워드를 다시 떠올리며 그 개념을 실재로 만들고 싶어졌다.
동시에 다양한 철학자들이 각자의 논리에 따라 전체주의를 옹호하거나 실컷 두드려 패는 부분에서 내 안에도 독재자의 싹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인류와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고 싶은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것도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포함할 수 있다. 위험한 사상과 이상적인 모델 사이에는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또 다른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명확한 대안’ 대신 끊임없는 ‘부정성’을 부르짖는 비판 이론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현존하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긍정적인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비판 이론의 매력이다. 그 순간부터 무언가가 가능할 것이라는 대책 있는 낙관이 내 삶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철학적 대전환’보다 자아의 대전환을 먼저 맞이한 나는 독서모임을 통해 아주 충만한 경험을 했다. 책에 대해 할 말은 정말 많지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을 하는 연습을 열두 번 반복했다. 혼자서 글을 쓸 땐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문득 2년 전에 나의 치부와 약점을 감추는 데 급급해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던 때에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들키지 않고 생각을 쏟아낼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했던 시기가 떠오른다. 그 두려움이 프랑수아 누델만의 <철학자의 거짓말>을 읽게 했다.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거짓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분명한 메시지와 과거에 했던 적극적인 실천 덕에 거짓말이 불러올 결과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진실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최근에야 내 안에서 완성했다. 그리고 정직을 장착한 상태에서 만들어낸 문장이 누군가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 사람의 감상문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은 독서모임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1년 동안 깨달은 건 내가 그 과정을 목격하는 순간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