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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Aug 14. 202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비가 채워준 마지막 메시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쓴 룰루 밀러와 나의 공통점은 과학자인 아버지를 둔 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해준 말은 전혀 다르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특이한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밀러의 아버지는 밀러에게 “넌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내 아버지는 모태신앙이고, 밀러의 아버지는 무신론자다. 밀러와 나는 이토록 서로 다른 메시지를 주입받았는데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도 하나의 신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여기서 출발한다.


밀러는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은 비약하지 않지만 인간의 논리는 비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 없는 물고기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는 인류사의 중대한 과업을 실행하면서도, 실험실을 신전처럼 여겨 그곳에 침범하는 세력을 해고와 살인으로 제거하고 인종의 우열을 가려 열등한 유전자를 말살시켰던 조던은 가장 끔찍한 맹신의 완벽한 표본이다. 그리고 조던이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던 결과로 강제로 배가 갈라져 나팔관이 손상되는 불임화 수술을 받은 애나의 사연만 봐도 신념이라는 단어는 그 순간 공포스러워진다. 이렇듯 믿는다는 건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진실과 진실인 것처럼 꾸며낸 것 사이에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새로운 분류법을 통해 어류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이미 오랫동안 존재하는 줄 알았던 물고기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상황은 당황스럽다. 이에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은 인간이 오류 가능성과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황스럽더라도, 마음대로 넘겨짚고 오해하고 잘못 활용했던 과거를 의심하고 거기서 비롯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다짐은 한 가지 믿음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믿지 말라는 메시지 때문에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 금지 원칙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신이든 아니든 믿음을 쏟아부을 대상을 필요로 하고, 믿음의 양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때 과학자 아버지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과학이 부순 믿음은 다른 어딘가에라도 향해야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의미도, 신도, 내세도, 운명도, 계획도 없다고 했던 밀러의 아버지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시각에 깃든 장엄함과 개인의 쾌락을 쫓았고, 자연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 인류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내 아버지는 자연이 신의 창조물이라고 굳게 믿는다. 만약 밀러가 말한 것처럼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면, 이 기묘한 원리를 ‘신념 보존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겠다.


그런데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신념이라면 그다음에는 뭘 해야 할까? 난 밀러가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썼던 것을 떠올렸고, 그에 따른 연쇄 반응으로 지난달에 봤던 영화 <바비>를 떠올렸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대형 스크린을 통한 페미니즘 선언문 낭독회에 참석한 것처럼 느꼈던 그날, 나는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메모장에 '의심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라고 썼다. 그저 한결같이 발랄하고 평화로운 ‘바비랜드’ 한가운데서 죽음을 의심하고 발바닥이 편평해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얼 월드’로 떠나는 바비는 틀림없는 주인공이다. 바비랜드는 페미니즘이란 개념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세상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 함께 고민하며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곳이고, 매일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수많은 바비들은 이미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리얼 월드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메시지가 너무 부족해서 오히려 절실한 상태다. 나 또한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어떤 때에는 답답한 마음에 페미니즘이 필요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현재 진행 중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페미니즘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무언가를 미련 없이 버리려면 완전히 가져야만 하니까.


책을 다 읽고 덮은 뒤에 난 약간의 공허함을 느꼈다. 뭘 해야 할지는 이제 알겠는데, 왜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답이라도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정치철학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헤겔은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반복된다.”라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이에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덧붙였다. 난 이들에게서 의심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를 확인받았다. 때마침 작년 8월 10일 일기에 썼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기를 꿈꾼다'는 내용은 마치 계시처럼 나타나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던 밀러의 말도 의심이 반드시 어떤 변화를 일으킬 거라는 확신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사실 내가 바로 알아채지 못했을 뿐, 그녀는 이미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한편 우리는 가끔 약의 효능과 부작용까지 의심하느라 치료되지 않은 질병이 일으키는 무기력과 정체 상태에 빠진다. 손에 든 도구를 믿지 못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무한한 의심 속에서 길을 잃을 땐(과학적 세계관이 불러일으킨 허망함에 빠질 땐)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어 리얼 월드로 뛰어든 바비가 해법을 가르쳐 준다. 무언가를 믿지 않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질 땐 다시 현실 세계의 고통으로 눈을 돌리자. 오직 거기서만 신이 아니고 신이 만들지 않았으며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밀러도 이에 대해 똑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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