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는 말이 꽃이 되어

by 김포샤

‘처음’이라는 단어는 낯설지만 묘하게 특별하다.

두려움과 설렘이 한데 뒤섞여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문다.

나의 첫 이식 환자와의 만남 역시, 여러 이유로 지금까지 마음 깊숙이 남아 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몇년 전, 처음으로 이식 간호사로 일하는 날. 내 첫 환자는 과묵한 중년 남성 B씨였다. (참고: 병동 간호사로 경력을 쌓은 후 이식 간호사 듀티로 일할 수 있다.) 아예 모르는 환자는 아니었고 종종 담당 간호사로 일해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몰톡을 시도할때마다 번번히 튕겨내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길도 안 주셔서, 나를 싫어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B씨의 병실에 들어갈때면 최대한 간결히 설명하고 빨리 약 주고 나오기 바빴는데...웬걸. 첫 이식환자가 B씨인걸 알게 됐다. 사람 대 사람으로 싫어하는건 전혀 아니었지만, 라포(rapport)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환자라 긴장이 배가 됐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제대혈 주입.

(제대혈은 탯줄과 태반 속에 존재하는 혈액으로,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들어내는 줄기세포가 들어 있다.)

많은 환자들이 이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B씨는 말이 없었다. 환자의 활력징후는 안정적이었고, 부작용 증상도 없어 차팅할 것도 거의 없었다. 병실에는 침묵만 흘렀다. 나는 노트북 위에 올린 손가락만 괜히 만지작거리며 흘끗 곁눈질했다. 그는 천장만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건넬지 머릿속이 분주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는 어린 간호사였던 나는 이 침묵을 깨뜨릴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B씨의 시선을 열심히 따라가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후 제대혈 주입은 생각보다 금방 마무리되었다. 무사히 끝난 기념으로 마무리 인사는 꼭 하고 싶어 머뭇거리다가 "수고하셨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내 눈을 잠깐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말이 참 없는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대답을 들은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들떴다.


그리고 다음 날, B씨는 다시 대답없는 과묵한 환자가 되었다. 조금 친해졌나? 하는 혼자만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퇴원하는 날에도 여전히 눈맞춤이 없는 B씨에게 잘 가시라는 인사를 건네기가 참 어려웠다. 그렇게 타이밍만 보고 있던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B씨였다. 하얀색 중절모에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B씨가 중절모를 벗어 가슴 위에 얹은 뒤 "그 동안 수고했어요.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것 같다.


그 동안 함께했던 간호사에게 잊지 않고 인사를 해줘서.

약 한 달하고도 보름의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후가 좋지 않다는걸 알아서.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B씨를 여기서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다. 퇴원할때서야 겨우 친밀감이 든 것 때문인지, 마지막 인사가 마음 속 깊숙이 박혀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그냥 기도했다. 그렇게 1년 후, B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을때까지 나는 그의 안녕을 열심히 바랐다.


타 병동에 잠시 들렀다 접한 B씨의 사망 소식.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떠오르며, 그때 조금 더 웃으며 인사할걸, 표정을 더 자세히 기억해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는 “간호사로 일하다 보면 흔히 겪는 일 아니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정중한 인사와 함께 남긴 그 짧은 “고맙다”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일 이후로는 어색하더라도 환자의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건네려 애쓰게 되었고, 그래서 B씨는 나를 바꿔준, 잊지 못할 나의 ‘처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고맙다는 말은 꽃이 되어, 지금도 내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


※이해를 돕기위한 설명

장기이식은 병동에서 수술장으로 이동해 시행하지만 조혈모세포는 병동 안에서 주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관련한 모든 준비는 병동에서 하며, 이것을 담당하는 간호사는 어느 정도의 숙련도가 있어야 합니다.(신규는 할 수 없음). 조혈모세포이식은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30분~2시간까지도 걸리는데 주입량과 부작용 발생 정도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습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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