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를 도난당했다

놓아주기로 했다.

by 주택야독

(2024년 12월 28일 '나의 기록'을 다듬어 올린 글입니다.)





택배를 도난당했다



꽤 많은 수의 택배기사들은 탑차 문을 열고 배송일을 한다.

한 곳에 주차를 하면 주변에 여러 배송지가 함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탑차 문을 활짝 열고 트럭 측면에 고정을 해둔다.

얼마 안 가 다음 배송지가 있기 때문에,

탑문을 열어둔 채로 고정하고, 차를 운전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나의 배송지는 특히 빌라가 밀집한 골목길이 많다.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아주 금방 다녀올 것이기에,

탑문을 열고 고정한 채로 골목길을 배송해왔다.


그러다 '그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택배를 배송하는 데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탑 안에 쌓여있는 물건을 그때 그때 바로 찾아 배송하는 기사님들도 계시고,

나처럼 어느 정도 짐정리를 해놓고 배송하는 기사님들도 계신다.


나처럼 아파트가 아닌 빌라가 많은 골목의 기사라면,

같은 구역이라도 건물의 종류가 다양하다.

아파트처럼 동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를 주차하고 탑 안에 들어가서 '짐 정리'를 먼저 한다.

내가 가는 루트대로, 순서에 맞춰서 집을 나열해놓는 것이다.

이러면 물건을 그때 그때 찾지 않아도 되어, 일이 더욱 순조로워진다.



그 날도 짐 정리를 해놓은 상태로, 한쪽 문이 열린 탑차를 끌고 다음 배송지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리해둔 짐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손바닥만한 크기의 상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탑 안에 짐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상자 하나가 없어졌다는 건 더욱 확실해졌다.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짐 정리를 한 건, 바로 전 배송지에서였다.

만약 그 상자를 운전 중에 흘렸다면 전 배송지에서 현 배송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런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 배송지를 왕복하여 찾아보아도 없어진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멍해졌다.

뇌가 고장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몰라,

택배 어플로 어떤 물건인지, 또 가격은 얼마인지 찾아보았다.


주름을 없애주는 화장품이었다.

가격은 무려 28만 7천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택배 하루 일당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보통 택배 상자를 분실하면 택배 사고로 처리되고,

온전히 기사가 배상하게 되어있다.


게다가 배송 스캔을 찍은 후 였으니,

그 배상은 모두 내 몫이었다.


머리가 아찔했고, 불안감에 패닉이 왔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바로 블랙박스였다.


택배를 처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블랙박스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업체와 브랜드를 알아보며, 이 말을 많이 들었다.


"어차피 택배하시는 분들은 거의 블랙박스 안 달아요. 달아봤자, 전방만 달지 후면까지 잘 안 달지, 뭐."


블랙박스 업체 직원분들도, 주변 택배 형님들도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여자친구의 강력한 설득에 못 이겨,

전후방이 다 녹화되는 블랙박스를 구입했다.



놀랍게도, 그 효과가 지금 발휘되고 있었다.

블랙박스를 다시 보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 길가를 두리번거리더니,

내 탑차에 스윽 접근했고,

내가 잃어버린 그 작은 상자를 몰래 들고 간 것이었다.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이런 일을 겪다니.

택배를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니...




3년 동안 택배하며 처음 택배 상자를 도난 당해보았다.

그동안 난 늘 탑차 문을 열고 배송했다.

도난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가 없었다면 난 내가 흘린 걸로 알고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했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봤던 블랙박스.

그것도 후방 카메라에 범인이 찍혀있었다.


날 강력히 설득했던 여자친구에게,

무사히 녹화되고 있었던 블랙박스에게,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범인을 찾았다.

그것도 범행 순간을 녹화까지 해냈다.


난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사건 접수도 했다.

여자친구 역시 날 걱정하며, 바로 현장으로 찾아와주었다.



그런데 하필 범인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패딩바지에 두꺼운 점퍼까지..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건.

무슨 꿍꿍이인지, 훔친 택배박스도 바로 옆 빌라 앞에 위치한 실외기 밑에 숨기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다시 갔을 땐 물건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범인이 작은 상자를 넣었던 실외기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더더욱 소름이 돋는 건.

내가 물건을 찾기위해 사건 현장에 돌아가서 찾아본 뒤, 다시 다음 배송지 쪽으로 차를 돌릴때,

그 범인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영상 속 범인은 패딩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깊게 집어넣고 다른 쪽 길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 주머니 속엔 그 고가의 화장품이 있었을 거로 추정한다.


택배도난.jpg


범인은 바로 내 트럭 옆을 스쳐지나갔지만,

난 범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욕도 나오고 화도 났다.

착잡함과 동시에 찝찝했다.


화장품 가격인 28만 7천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머리 어딘가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자친구가 남은 40개의 배송 물량을 도와준 덕에,

무너진 멘탈을 겨우 붙잡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퇴근하던 중, 다시 그 근방을 지나게 됐다.

그런데..

그 범인과 인상착의가 똑같은 사람을 마주한 것이었다.


회색 캡모자에 검정후드.

검정 점퍼.

격자무늬의 패딩바지, 흰양말, 뒷꿈치에 라인이 있는 검정신발까지..


차를 대충 대놓고 뛰었다.

무작정 붙잡고 물었다.


“XX빌라.”

“네?”


영문 모를 표정을 짓길래 고민 없이 대놓고 물었다.


“택배 훔쳐갔죠? 아까 XX빌라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여기서도 너무 아쉬웠다.

비록 모자 마스크를 썼어도 눈은 보였는데, 조금 더 표정을 잘 관찰해볼걸..

하는 아쉬움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었다.

보통 결백한 사람이라면 발끈하거나 왜 그러시냐고 따져물었을텐데 말이다.


“인상착의가 똑같아서요. 경찰에 신고해서 곧 찾을 것이거든요. 처벌 안 할테니까 솔직하게만 말해주세요.”

“똑같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저 진짜 아니에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인상착의가 똑같아도,

내가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무례하고 실례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죄송하다 말하며 보냈다.

돌아오면서 너무 일치하는 인상착의에 고개가 갸우뚱 되었다.


혹시 몰라 다시 쫓아가서 붙잡고 말을 건냈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말을 더듬으며 황당한 핑계를 대었다.


서비스 센터에 맡겨서 폰이 없다는 것이었다.

참 공교로웠다.


결국 그냥 난 트럭으로 돌아왔다.

인상착의가 같다는 것 말고는 아무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경찰도 아니고..

뭐라고 할 아무 권한, 능력도 없었다.


물론 지금의 난 여전히 그 사람이 범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5년 1월 1일.

바뀐 건 하나도 없다.


그 이후로 난 범인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경찰의 수사 또한 시작되지 않았다.

난 그 물건을 사고처리해서 물어줘야 하는 입장에 처했고, 찝찝함과 분노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 날로부터 5일 후, 1월 2일.

드디어 사건이 형사과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7일 후, 1월 4일.

담당 형사와 드디어 연락이 되었다.

내 블랙박스 녹화본 영상을 보냈다.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형사는 연락이 잘 안 됐다.


수차례 연락했지만,

범인이 쓴 마스크와 모자 때문에 수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현장에는 방범용 CCTV도 있었지만,

끝내 범인을 추적해내진 못했다.


그리고 2월 7일.

형사와 마지막 통화를 했고, 여전히 범인을 못 잡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이후 난 이 사건을 마음에서 놓아주었다.



지금의 난 무조건 탑 문을 닫고 배송한다.


혹시 모르니까.

직접 겪어보았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난 무조건 탑문을 닫는 걸 습관화시켰고,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여전히 답답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억울한 일 한번 안 겪어본 사람이 어딨겠나라는 생각하며,

그 사건을 놓아주기로 했다.


덕분에 더욱 안전한 습관을 만들 수 있었다.

더 비싼 물건이 아니었음에 감사했다.

날 위로해주고 힘을 주는 존재가 매 순간 함께 해줌에 감사했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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