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터치다운

by 꿀꾀배기


예정된 납품일은 아직 한 달이 넘게 남았지만, 무아지경으로 작업에 몰두한 나는 순식간에 다섯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억눌려 있던 창작의 욕구를 분출하고 나니 가슴은 뻥 뚫린 듯 상쾌했다. 이제 남은 일은 그중에서 납품할 두 점을 천천히 고르는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 안드로이드 집사에게 와인과 과일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다음, 홀가분한 기분으로 천을 펼쳐 작품들을 덮었다.

정원 한쪽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포도, 키위, 자몽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처음 느꼈을 때의 그 짜릿한 감흥은 사라져 있었다. 새콤달콤하고 싱그러운 맛,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던 과일들. 별장에 처음 도착했던 며칠 동안은 정말 미친 듯이 과일을 찾아 먹었다. 마치 당장 과일을 먹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처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과일은 집사에게 요청만 하면 중앙 농원에서 한 시간 안에 배달됐다. 신선도가 살짝 떨어지면 미련 없이 버리고, 냉장고는 늘 새것으로 채워졌다. 식재료뿐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얼마든지.

차고 넘치는 요리와 과일 따위는 순식간에 지루해졌다. 이젠 뭔가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그 순간, 정원 너머 굉음을 내며 도로를 스치듯 지나가는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왔다. 유려한 곡선과 번뜩이는 외관, 바람처럼 미끄러지는 속도감.

'차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디바이스를 꺼내 잔고를 확인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거대한 액수는 몇 달 동안 아무리 호화롭게 써도 거의 줄지 않았다. 작업도 끝났겠다, 바람도 쐴 겸 쉘터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별장 밖으로 나온 나는, 가장 먼저 자동차부터 샀다. 운전은 할 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자동 주행 차량에는 아예 운전대조차 없었다. 다음엔 옷. 양복을 몇 벌 더 맞추고, 평소에 입을 편한 옷도 여러 벌 골랐다. 기장을 따로 수선할 필요도 없었다. 다양한 옷들이 넘칠 만큼 많았고, 그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고르기만 하면 됐다. 결제를 마치며 직원에게 물었다.

"이곳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나요?"

손목의 스캐너로 바코드를 인식하던 안드로이드 직원이 정중히 답했다. "고객님처럼 쇼핑도 하시고, 공연을 보러 가거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스포츠라..." 쇼핑백을 안드로이드 집사에게 넘기며 물었다. "오늘 하는 경기가 있어? 아무거나 보러 가자."

"잠시 후 미식축구 경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H 님의 ID 코드가 등록되어 있어, VIP 룸에서 관람 가능합니다."

"좋아, 안내해 줘."

전쟁과 함께 모든 스포츠 프로 리그는 중단되었다. 스폰서 기업은 무너졌고, 수많은 선수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종전 이후 통일 지구 협약이 체결되며 국가의 구분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일부 선수들과 S기업의 자본이 모여 몇몇 종목이 쉘터 내에서 재건되었다. 모든 경기는 생중계되었고, 나 또한 어린 시절 TV로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의 선수들은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고, 선명한 근육을 두르고 있었다. 죽지 않으니까, 그들은 거리낌 없이 약물을 사용했다. 경기는 그만큼 더 격렬해졌고, 사람들은 그들의 자극적인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많았지. 도피처가 그것뿐이었으니... 응원하는 팀이 우승 못했다고 섬에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니까."

VIP 룸 유리창 앞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방 한 면이 유리로 된 그곳에는 열 명 남짓의 인원이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곁들여 경기를 관람 중이었다. 안드로이드 집사는 그것이 자신에게 한 말인지, 독백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 오늘 경기의 관전 포인트를 알려드릴까요? 핵심 선수는 불스 팀의 에이스 제이크, 그리고 엘리펀츠 팀의 주장 스완슨입니다. 4연승을 달리는 불스가 1위 엘리펀츠까지 꺾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안드로이드가 허공에 띄운 홀로그램 화면에 두 선수의 얼굴과 간단한 정보들이 펼쳐졌다. 핑거푸드를 집어먹으며 화면을 훑었다. "4연승이긴 한데, 다 약팀 상대였네. 그것도 점수 차가 크지도 않았고. 오늘은 연승이 끊기겠는데? 1 쿼터인데도 점수가 꽤 벌어졌어."

그때, 한 남자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셔츠의 윗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 젖힌 그는 한 손에 캔 음료를 들고 있었다. "단편적인 숫자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인사도 없이 불쑥 치고 들어온 남자의 말에 당황한 나는 기침을 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세부 과정을 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어요. 4연승 기간 약팀 상대로 쉬운 경기는 아니었지만, 전부 역전승이었습니다. 선수들 평균 나이가 어리고, 분위기를 타면 무섭게 달아오르죠. 주사 이후 나이와 운동 능력은 아무 관련이 없어졌지만, 멘털적인 부분에서 자신감과 당돌함이 남달라요. 흐름을 탄 지금의 불스는 이전과는 다를 겁니다."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신의 분석에 열정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스의 팬인가 보네요. 그럼 오늘 불스의 승리를 예상하시나요?" 나는 그에게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남자는 캔을 들어 부딪쳤다. "하하, 팬은 아니고, 스포츠를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네. 불스의 4 쿼터 역전승 확률이 꽤 높다고 봅니다."

그 순간, 엘리펀츠가 다시 득점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커졌다. 피식 웃으며 남자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요지부동이었다.

"스포츠는 변수가 가득하지만, 제 계산으로는 불스가 역전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수비에서 실수가 계속 발생합니다." 집사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저기, 벤치에 앉은 77번 선수를 주목해 보세요. 오늘 처음으로 정식 등록된 선수입니다. 3 쿼터 이후에 투입될 예정인데, 그가 조커입니다." 남자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나와 집사의 시선이 동시에 벤치 쪽으로 향했다. 번호 77. 유난히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등에 적힌 77번이 작게 느껴졌다. 숨 쉴 때마다 그의 등 근육이 묵직하게 꿈틀거렸다.



2 쿼터가 끝날 때까지 불스는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한 채 답답한 흐름을 이어갔다. 1위 팀 엘리펀츠의 노련함과 조직력은 여전히 견고했고,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작전타임을 가진 두 팀의 감독이 열정적으로 작전 지시를 이어갔다. 뜨거운 열기 속에 3 쿼터가 시작됐다.

그리고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불스 선수들은 여전히 뒤지고 있음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고 뜨겁게 타올랐다. 3 쿼터가 절반 정도 흐르는 동안, 점수 차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엘리펀츠는 당황한 듯 타임아웃을 요청했다.

타임아웃 이후, 경기장에 다시 선 선수들 사이로 '77번'이 눈에 들어왔다. 정체 모를 남자가 말했던 '조커'였다. 그는 조금 긴장한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피부 아래로 들끓는 핏줄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울컥거렸다. 그 비인간적인 외형은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보였다.

엘리펀츠의 공격을 시작으로 경기가 재개됐다. 어느샌가 아예 내 옆에 자리 잡은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 뒤로 가는 선수 근처에서, 일부러 패스 길을 열어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펀츠의 공격수가 진영을 깊게 파고들었다. 77번은 그것을 놓친 듯 어설프게 반응했고, 공을 들고 있던 선수가 그 틈을 보고 힘껏 패스했다. 77번은 그제야 뒤늦게 침투하는 선수에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커다란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분명 공과 거리가 있었던 77번이, 짐승처럼 튀어나가 순식간에 공을 가로챘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하고 매서운 움직임. 경악스러웠다. 저게 인간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인간과는 아예 다른 존재 같았다. 포효하는 그의 모습에 불스 팬들은 열광했고, 엘리펀츠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옆에 있던 남자도 박수를 쳤다.

"와... 몸집을 봐서 블로킹 전문인 줄 알았는데, 엄청 빠르네요." 감탄하며 말했다. 남자는 흥분한 듯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며 말했다. "그렇죠? 그는 언제나 리스크 넘치는 플레이를 시도하죠. 그리고, 대부분 성공해 냅니다. 머지않아 슈퍼스타가 될 거예요. 게다가, 그는 공수 가리지 않아요."

보통 미식축구는 공격과 수비를 나눠 다른 선수들이 투입된다. 하지만 77번은 여전히 경기장에 있었다. 그가 공수 양면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3 쿼터가 끝날 때까지, 엘리펀츠는 77번의 폭발적인 움직임에 휘둘렸다. 점수 차는 급격히 좁혀졌고, 불스 팬들의 열기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4 쿼터가 시작되자, 다시 흐름이 변했다. 엘리펀츠는 77번을 집중 마크하기 시작했고, 그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아... 태클이 제대로 들어갔네요. 엘리펀츠가 77번을 완전히 읽은 것 같은데요?" 어느새 경기에 깊게 몰입한 나는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괜찮습니다. 이건 팀 스포츠니까요. 시나리오는 완성됐어요."

불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여전히 수비는 77번에게 몰려 있었고, 그는 묵묵히 상단으로 달렸다.

"... 그렇지. 모든 주목을 끌고, 압박을 견디기만 하면 돼... 이겨낼 필요 없어." 남자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공을 든 선수가 77번을 힐끗 봤지만, 그의 주변에는 패스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던 그 순간, 다른 한 선수가 빠르게 움직였다. 등번호 10번의 그는 77번이 몰고 간 수비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공을 받아낸 그는 황소처럼 달려들었고, 연이은 수비를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하나둘 따돌렸다. 최후방 수비가 태클을 시도했지만,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피한 뒤, 그대로 엔드존까지 달려가 터치다운을 성공시켰다. 경기장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렇지! 제이크, 불스의 에이스!"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그 터치다운을 기점으로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세가 오른 불스는 더욱 거세졌고, 엘리펀츠는 무너졌다. 결국, 불스는 4 쿼터에 역전승을 거두었다. 남자가 말한 대로였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덕분에 재밌게 봤습니다."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대화 상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에이전트예요. 77번도 제 선수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팬이 아니라던 그가 왜 그렇게 경기에 몰입했는지 이제야 이해됐다. "그렇군요. 어릴 때부터 달리기에 재능이 있었던 건가요?"

내 물음에 말없이 웃던 남자는 남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달리기 재능?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의 진짜 재능은, '약물에 대한 민감성'이었어요. 보통 주사를 맞은 사람들이 낳은 아이들은 신체 성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약물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체내에서 다 걸러지죠. 하지만 그는 불량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예요. 그의 몸은 돌연변이였고, 어릴 때부터 약물을 100퍼센트 흡수했어요. 그리고 나는 쉘터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랩과 다리를 놔줄 수 있죠. 좋은 약과, 그걸 부작용 없이 전부 흡수하는 몸. 이 세계에서 그보다 중요한 건 없죠."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프로 스포츠는, 누가 더 좋은 약을 쓰는지, 누가 약물을 더 잘 흡수하는지가 성패를 좌우해요. 선천적인 운동 능력? 그런 건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죠."

"하지만...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약물로 승패가 갈린다면, 이건 스포츠가 아니라 화학전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남자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맞아요. 이건 진짜 스포츠가 아니에요. 모두 가면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죠. 이건 가짜라는 걸."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J, 전 당신을 알고 있어요. H의 디너쇼에서 당신을 봤죠. 오늘 갑자기 친한 척을 해서 놀라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저는 당신에게 친밀감을 느껴왔어요. 그리고 다행히도, 당신은 제가 생각한 부류의 사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황한 나에게, 남자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전 C라고 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한 '리얼 월드'를 알고 있어요. 제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순간 눈앞에 미지의 엔드존이 보이는 듯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몰라도,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터치다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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