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신세계 프로젝트

by 꿀꾀배기


별장에서 하루 더 휴식을 취한 나는, H의 말대로 E 구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초대받지 않은 불편한 손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살던 집으로 가볼까, 아니면 공원을 갈까? 아, 공원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거긴 그때 묻은 시체가 있다.


시체, 살인자... 그녀가 지금 여기 어딘가에 있을까? 그녀가 만나고 싶었다. 나를 매혹하던 순수한 욕망의 색채.


지금까지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게 패착이었다. 예술을 수단으로 대하고 말았던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초심을 잃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그녀와 다시 만난다면, 분명히 이전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나는 미스터나인의 앞에 섰다. 뉴스에서 봤을 때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는데, 사건이 종료된 지금은 이전에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그려댔던 핏자국으로 창가가 검붉게 얼룩진 점만 빼면 말이다.


가게 안은 모든 시체 덩어리들이 사라지고, 약간의 핏자국만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공기 중엔 눅눅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먼지 쌓인 식탁과 부서진 의자 사이를 지나 걷다가,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은 여전히 청결했지만, 냉장고를 열자 안에는 상한 식재료가 가득했다. 나는 코를 부여잡으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때, 냉장고에 붙어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내 발치에 떨어진 그것은 열쇠였다.


"13-241-403?"


익숙한 배열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이건 거주 건물 번호였다. 13 구역의 241번 건물, 403호. 미스터 나인이 빈티지를 사랑하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번호 키가 있는데도 자물쇠를 고집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가게 밖으로 나와, 자연스럽게 열쇠에 적혀있는 거주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어쩌면, 그에 대한 그리움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가게에 즐비한 엔티크 가구와 소품들만 봐도 그랬다. 그가 만드는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풀고기라는 건 사실 벌레였다. 중앙 도시와 외곽 지역을 구분하는 황무지에 서식하는 커다란 벌레. 에너지바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벌레도 그것이라고 했다. 같은 재료로 만든 건데 에너지바는 푸석하기만 하고 아무 맛이 없는 반면, 미스터 나인이 만든 음식은 그 당시 나와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황홀할 정도였다.


그와 그의 가게는 모두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뉴스를 통해 그가 X 연구소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꽤나 놀랐다. 앞치마를 두르고 잔을 닦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어서 그런지 연구소라는 공간과는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의 집에 그와 관련된 것들이 남아 있을까?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오늘에서야 오랜 궁금증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01... 402... 403."


나는 13-241-403호의 앞에 섰다. 기본적으로 달려있는 번호 키는 제거되어 있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E 구역의 모든 거주 건물은 크기와 구조가 같기 때문에, 마치 내가 살던 방처럼 익숙했다. 화장실로 가는 문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네모난 거실이 있다. 안쪽엔 침대가 있고... 내 방과 다른 점은, 여긴 책장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제일 윗줄은 전부 요리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고 그가 요리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한 수많은 일지들이 있었다. 전부 타이핑이 아닌 손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연도별로, 일자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걸 보고 그가 연구원이었다는 걸 납득하게 됐다.


그 아래로는 다양한 주제의 서적과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액자도 하나 놓여 있었다. 액자 속에는 미스터 나인이 제일 왼쪽에 웃고 있었고, 옆으로 연구복을 입고 있는 다른 이들이 모두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 오른쪽에도 미스터 나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도, 미스터 나인이 또 있었다. 그가 세 쌍둥이였나? 셋은 정말 빼다 박은 것처럼 똑같았다.


가운데에 연구복이 아닌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있었다. 남자 한 명에 여자 둘. 어? 이 여자애...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다. 분명 낯이 익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제일 아래쪽 구석에 또 다른 일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을 하나 꺼내 보았다.

표지에는 '8'이라고 적혀 있었다.




2XXX년 X월 X일


오늘은 놀라운 날이다. 드디어 우리의 노력이 빛을 보게 되었다. 전쟁 중인 세상을 재건하는데 힘이 되자는 일념으로 시작했던 우리 연구팀이 X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S 기업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린 앞으로 방산 기업이었던 S 기업의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 했다. 덕분에 이젠 돈 걱정 없이 미래를 위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에바, 마이클, 정현, 메르센, 그리고 쓰리와 세븐. 너희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야.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기술은 전부 우리 손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축하 파티를 해야 한다. 이미 에바는 만취 상태인 듯하다.




2XXX년 X월 X일


오늘은 X 연구소에 100번째 연구원이 들어온 날이다. 연구소의 확장을 제안한 S 기업이 인사 과정을 전부 도맡기로 했고, 처음에는 낙하산이 잔뜩 들어오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전부 기우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인재들을 긁어 왔는지, 하나같이 천재들이었다. 역시 S 기업은 허투루 하는 게 하나도 없다. S 기업 소속으로 들어가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다. 조만간 생명공학 분야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명공학은 우리의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앞서 의학계에 큰 호평을 받았던 우리 연구들이 많은데, 그와 관련된 걸지도 모르겠다.




2XXX년 X월 X일


'신인류 프로젝트'. 이름부터 웅장하지 않은가? 에바와 정현은 구리다고 했지만 난 마음에 든다. DNA를 조작하여 암에 걸리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연구를 발표했던 적이 있는데, S 기업은 그 연구를 보고 우리를 선택했다고 했다. 우린 이제부터 '신인류'를 만들게 된다. DNA 개조를 통해서,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이 세상의 모든 병마로부터 면역인 그야말로 '신인류'를! 우린 복제 인간도 성공적으로 만들었던 아주 유능한 팀이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도 성공할 수 있을 거다. 나와 쓰리, 세븐이 보장한다.




2XXX년 X월 X일


아주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내 원본인 '원'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복제 인간 프로젝트에 성공하여 나와 쓰리, 세븐을 만든 이후 원은 홀로 S 기업으로 떠났었는데,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한 마지막 퍼즐이라고 하는 어떤 고등학생을 데리고 왔다. AI와 대결하는 추리 연산 대회에서 우승을 한 천재라고 한다. 경악스러운 소문의 그 친구는 예상과는 달리 아주 말끔하게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여학생도 두 명 같이 들어왔는데, 한 명은 원의 입양아이고, 한 명은 회장 L의 친딸이라고 했다. 모두 국제 영재 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했으니 이 둘도 범상치 않은 친구들인 모양이다. 셋은 자주 같이 다녔는데, L의 딸이라고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시끄러워 좀 방해다. 잘 사는 집 딸이라 그런지 아주 제멋대로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연구 중에는 꽤나 진지한 모습으로 임하는 걸 봤다. 어린 친구들이 아주 대견스럽다. 자주 가서 먹을 걸 사줘야겠다.




2XXX년 X월 X일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제가 되는 DNA를 개조하고 슈퍼 DNA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반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겨났다. 온몸이 나무껍질처럼 쪼그라들며 근육이 괴사하고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괴상한 병이었다. 이상한 점은, DNA 개조를 시도하지 않은 일반 실험체에서는 발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성과 보고회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고 난 이후, S 기업은 '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팀을 만들었다. 프로젝트는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고, DNA 개조를 통해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 다양한 서브 미션들이 생겨났다. 우리 팀은 원래 목표를 위한 연구를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지만, 원이 주도하는 다른 팀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S 기업이 하는 일이니, 이 세상을 위한 것이겠지. 천재 소년은 요즘 일이 힘든지 얼굴이 좋지 않다. 이따 좋아하는 초코 음료라도 챙겨줘야겠다.




2XXX년 X월 X일


오늘은 L이 직접 연구소에 찾아왔다. 그녀는 언제나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묘하게 기가 죽게 하는 아우라가 있다. 에바는 그녀가 눈을 마주치면 눈웃음을 짓는 게 열받는다고 했다. 에바는 조금 삐뚤어진 사람인 것 같다. 연구소를 한 번 순회한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다가오더니, 불임에 대해 연구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일지를 쓰면서 생각을 해보니 그쪽 배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거리가 있을 것도 같다. 다시 연구소로 가봐야겠다.




2XXX년 X월 X일


사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DNA 개조를 거친 일부 실험체의 생식 능력을 제거한 다음 지켜봤더니 원인 모를 병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DNA 개조와 생식 능력을 제거한 개체는 점점 젊어지기까지 했다. 즉, 우리가 원하던 '신인류'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단지, 자손을 낳을 수 없을 뿐. L은 어떻게 이걸 유추했을까? 아무튼 난 이 사실을 곧바로 보고했고, L은 아주 만족스럽다고 했다. 우리 팀은 성과를 인정받아 휴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S 기업이 만든 태평양 인공섬의 호텔 숙박권도 받았다. 연구소의 다른 팀들은 여전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모양이다. 뺑이 쳐라, 우린 놀러 간다!




2XXX년 X월 X일


휴가를 위한 짐을 싸고 있는데 천재 소년이 나에게 찾아왔다.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자기 생각에는 연구원들이 특정 수치의 오류를 유발하는 수식을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치 변수를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 같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팀이 원하는 공식을 통해 완성한 DNA 개조 주사는 정확히 예정된 숫자만큼의 일부 사람들에게 약효가 들지 않는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라 했다. 또, 그들의 자손 역시 높은 확률로 주사의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지 무섭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를 진정시키고, 아마 윗선에서 다른 생각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휴가에 떠나기 전에, 연구소에 들러 다른 팀이 뭘 하고 있는지 몰래 확인해 봐야겠다.




2XXX년 X월 X일


휴가를 취소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세계 프로젝트'. 우리 팀은 그 프로젝트의 일부일 뿐이었다. 프로젝트 개요가 적힌 파일을 찾아 읽었다. 충격적인 점은, 이 프로젝트는 전쟁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전쟁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먼저 쌓아놓은 것들을 전부 파괴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전쟁의 장기화를 위해 S 기업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전 세계에 무기를 보급했다. 무게 추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세력의 균형을 철저히 맞춘 것이다. 때가 된다면 S 기업은 물자의 차이를 유도하여 전쟁을 마무리할 것이다. 죽지 않는 인간에 대한 연구도 전쟁 이전부터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 해당 비밀 연구소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S 기업은 자기 손으로 연구소에 미사일을 발사했고, 1차 신인류 프로젝트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연구 기록지에 따르면, DNA 개조를 통해서 모든 병의 원인을 예방하고 노화를 막을 수 있었지만, 실제 인간의 나이로 환산했을 때 100세 전후를 지나고 나면 반드시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들은 그 나무껍질 병을 '죽음에 가까운 상태'라고 표현한 듯하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고자 했지만, 그들은 미사일에 맞아 전부 죽고 말았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만들고자 하는 '신세계'란 이렇다. 우선 A~E 구역으로 세계를 나눈다. 이후 70세 이하의 사람들에게 '신인류 주사'를 전부 투여한다. 긴 전쟁으로 인해 고령 인구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연령 제한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주사를 맞은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 낳기만 하니 인구수가 빠르게 포화상태가 된다. 그럼 그 폭발적인 인력을 이용하여 외곽 지역의 공장을 가동한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부품을 이용하여 거주 구역 외에 다양한 시설과 설비를 만들고, 기술력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쉘터'를 건설함으로써 도시 계획을 완성한다. 100살에 가까워진 이들은 복지 시설로의 은퇴를 유도하여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된 그들을 외부에서 발견하지 못하도록 한다. 안정화가 된 이후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동화 설비로 교체한다. 이쯤에서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대해 세간에 공개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태평양 인공섬에 병원을 세운 뒤 안락사 캡슐을 제공한다. 비난이 거세진다면 AI 챗봇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한다. 그렇게 포화된 인구는 다시 빠르게 줄어들어 세계는 정상화된다. 그리고, 쉘터의 인류는 최초에 불임 주사를 맞는다. 불임 주사는 신인류 주사의 부작용을 예방함과 동시에, 쉘터의 인구 포화를 막는다. 쉘터 나름의 불만이나 문제들은 스포츠, 성문화, 그리고 문화 예술로 해결한다. 그래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통제된 변수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불량품'으로 해결한다. 불량품은 계획에 꼭 필요한 핵심 요소이니, 빠르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최종적으로 이 세계에 쉘터만이 남는다.


동료들에겐 아직 알리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날 죽일지도 모른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 나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봐야 한다. 그래서 휴가를 반납했다. 이젠 바빠질 것이다.




2XXX년 X월 X일


그 어떤 것도 이 계획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재 소년이 변수가 완벽히 적용된 핵심 코드를 개발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계산이 맞는다면 두 달 안에 코드가 완성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크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코드를 개발하는 이상 그 목적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L의 딸의 이야기를 했다. 둘은 연인 사이인 모양이었다. 진작 그녀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나 그녀는 새로운 세상에 둘이 함께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계획을 수정해 볼 테니 일단 코드를 완성해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고민 중이었다고 했다. 사실 코드는 저번 주부터, 마음먹으면 4시간만 있으면 완성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한 달만 코드 완성을 미뤄달라 부탁했다. 그는 떠났고,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이 프로젝트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커다란 훼방꾼이 되기로 했다.




2XXX년 X월 X일


쓰리, 세븐과 나는 착실히 계획을 진행했다. S 기업 몰래 '신인류 주사'의 효과를 즉시 무력화하고 근육을 이완하는 약을 대량 생산했다. 훗날 쉘터의 모든 인류가 맞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새로운 복제 인간, '나인'의 배양 세포이다. 세포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우린 E 구역의 거주 건물에 이 배양 세포와, 무력화 약을 숨겨놓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세포가 성장을 마치고 성체로 깨어나면, 우리가 잘못되어 죽게 되더라도 그가 뜻을 이어 신세계를 부숴놓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원의 입양아라고 하던 소녀가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셋은 복잡한 관계로 이어진 듯했다. 그녀는, 제멋대로인 L의 딸이 천재 소년을 속여 코드를 얻으려 하니, 자신이 그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러나 원이 무서우며, 그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녀는 원에 의해 어릴 때부터 딸이 아닌 도구처럼 자랐으며, 스파이 활동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사용됐다고 했다. 지금도 사실은 천재 소년과 L의 딸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받은 상태이지만, 이제 모든 걸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소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해주었고, 반드시 그녀와 소년 또한 E 구역에 보내줄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이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식당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요리를 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린 마지막으로 계획을 추가했다. E 구역에 방을 하나 더 얻었다. 그리고 요리 관련 서적을 잔뜩 구매해서 내 서재에 넣어놨다. 나중에 계획이 진행되면, 그녀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모든 게 잘 됐으면 좋겠다.




다음 일지는 대충 휘갈겨져 있었다.




2 년 월 일


예상보다 빨리 청소가 시작됐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아직 배양 세포가 안정화가 되지 못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약은 이미 보내놨으니 정말 다행이다. 서재에 준비해 둔 서적과 일지는 쓰리와 세븐과 함께 차에 실었지만 우린 그 소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다행히 한 연구실에 쓰러져있는 소년과 소녀를 발견했다. 하지만 천재 소년은 숨을 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녀만 옆에 있던 캡슐에 집어넣어 차에 실었다. 그 과정에서 청소부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쓰리와 세븐이 희생했고, 연구원용 칩을 미처 제거하지 못한 나 역시 위치 추적에 잡힐 것이기 때문에 차에 탈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잡고 운반을 부탁할 생각이다. 길게 설명은 못하겠지만 부디 그가 일을 잘 마무리해 주길 바란다.




이게 마지막 일지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손끝이 덜덜 떨려 일지를 내려놨다. 조심스럽게 아까 보았던 액자를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여자.


그녀가 바로 작은 살인자였다.


뭔가 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식당을 운영했어야 할 그녀는 기억을 잃은 채 무력화 주사를 들고 애먼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고, 쉘터의 파괴자가 되었어야 할 미스터 나인은 E 구역의 식당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일지에 의하면 그녀는 지금과 달리 멀쩡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연구소에서 큰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나인 역시 세포가 안정화가 되지 못한 채 이곳으로 보내졌고, 운반을 부탁했던 행인의 실수로 두 사람이 갔어야 할 방이 서로 뒤바뀌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줄곧 의심에 그쳤던 것이, 비로소 확신이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것은 바로 쉘터와 그 중심에 있는 S 기업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제 명확한 사실이 되었다. 내가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아름답게 타오르던 노을이 영원히 저물어버린 것도.




세상을 원하는 대로 재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입맛에 맞게 사용한 뒤에 폐기 처분하듯이 섬으로 유기했다고?


고작 쉘터의 그 오만한 인간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서?


정말 이게 이 세상의 진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인간다움을,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내 노력은 전부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그딴 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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