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by 꿀꾀배기


'통일 지구 중앙회의 조사 결과 현재 E 구역에 남아있는 인구는 100명 이하인 것으로 발표되었으며, 이에 따라 E 구역 폐쇄 안이 빠르게 가결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E 구역으로의 출입이 제한될 예정이며, 앞으로 E 구역은 비거주 구역으로 분류됩니다. 중앙회는 이번 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던 건 통일 지구 시민들의 협력 덕분이며...'


"이런!" 나는 라디오 버튼을 내려쳤다. "이 상황이 말이 되는 겁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터전을 아무 이유 없이 폐쇄해 버린다고요?"


묵묵히 짐을 챙기던 K 서장이 말했다. "너무 열 내지 말게, T. 어차피 다 섬에 가버렸는데, 뭘. 그리고 아무 이유가 없다니, 자네가 말했잖아. 살인자가 아직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있나."


서장은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그럴 수밖에. 남의 일이 맞았으니까. 그에겐 E 구역 밖에도 터전이 있었다. 폐쇄 전에 가족이 있는 B 구역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처럼, 오갈 데 없는 이곳의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 이 세상에서 지워지게 된다. 법적으로 모두 안락사 섬으로 향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의가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주먹을 굳게 쥐며 말했다.


서장은 내 말을 듣더니, 짐을 내려놓고 나에게 걸어왔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T. 자네가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일세. 정의니 뭐니, 그런 건 이제 그만두고 남은 시간을 스스로를 위해서 쓰도록 해. 다 아무 의미 없는 허상일 뿐이야."


그는 내게 지금까지 우리가 순찰을 돈 이유는 E 구역의 잔여 인원수를 확인하고 보고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말해주었다. 또, 그동안 윗선의 부탁을 받고 수많은 비밀을 엄폐하고 뒤처리를 해왔다는 것도. 대부분 그가 단독으로 행한 것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내가 도움을 준 것도 많았다.

"모든 게 이상적으로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우리 같은 서민은 그런 철학자 같은 삶을 살 수 없어. 그저 싸우다 버린 시체 따위를 뜯어먹으며 눈치 보면서 사는 거지. 당장 살 궁리를 하는 게 우선이라고."


나는 짐을 챙겨 떠나는 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가족을 위해 정의를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에겐 가족을 지키는 것이 곧 정의였을지도. 나의 맹목적인 정의는 눈먼 정의였다. 이 세상은 내 정의를 버렸고, 그렇다면 나 역시 나의 정의를 찾아야 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잠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망설였을 뿐이다. 나는 눈을 뜨고, 가장 아래쪽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고이 접혀 있던 검은색 후드티를 꺼냈다. 아래에 같이 넣어둔 종이도 함께.


'간이 DNA 감식 결과지'


그날 발견했던 J의 후드는 피로 흥건하게 얼룩져 있었고, 나는 개인용 간이 DNA 검사 키트로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했다. 후드에서는 미스터나인 사건의 모든 피해자의 DNA가 검출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J가 이 사건의 진범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 대한 보고를 보류했다.


만약 중앙 경찰에 이 사실을 밝혔다면 E 구역에 대한 폐쇄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가족을 팔아서라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내가 관철하고자 했던 정의였겠지. 나는 그렇게 사랑하던 정의를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놓아버렸다. 나의 정의는 말뿐인 허세였으며 같잖은 나약함이었다. 나 역시 서장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정의를 지키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 신념을 지킨다면, 내가 소원하는 멋진 세상이 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다.


서장의 말이 맞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내 발버둥은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으면 될 뿐이다.




나는 후드와 감식지를 불태워버렸다.




허울뿐인 정의도, 나를 의미하던 여러 단어들도 이젠 없다. 나에게 남은 건, J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가족.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연락을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문득 쉘터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혹시 J도 이미 이곳을 떠난 걸까? 가족도, 삶의 터전도 나에게 남아있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한 과정이었을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공허한 마음으로 E 구역을 천천히 거닐었다. 아무도 없는 거주 구역을 지나, 공원에 도착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이곳은 유독 선선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홀린 듯이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은하게 들리는 벌레 울음소리,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 상쾌한 풀 내음이 느껴졌다. 마치 집처럼 포근한 기분이었다.


유독 잔디가 눌린 곳이 있었다. 누군가 밟거나 깔고 앉은 것처럼 이 부분만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날벌레가 무성하게 날아다닐 뿐, 별다른 건 없었다. 아니, 굳이 어색한 점을 찾자면, 다른 것들보다 크기가 작은 어린 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자라 있기는 했다.


여러 줄기가 배배 꼬인 것처럼 자라난 그 나무는 눈높이 정도 위치에 구멍이 몇 개 나있었다. 잘 보면 사람의 얼굴 같기도 했다. 어딘가 친근함이 느껴져 그 나무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산책로를 걸었다.




공원을 지나, 여전히 잘만 돌아가는 공장 구역을 넘어서, 다른 구역의 경계로 넘어가는 큰 길가에 이르렀다. 거리는 한산했고, 건물이 있을 뿐 황량한 황무지와 다를 게 없었다. 여긴 이제,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나는 다시 거주 구역으로 돌아왔다. 골목 하나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J의 집 근처에 가까워졌다. 어쩌면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을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묘한 향이 흘렀다. 씁쓸하고 포근한... 꽃향기인가? 이상하게 J의 얼굴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향을 J의 집에서 맡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후드에서도...


향기를 따라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그 향기는 나를 골목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작은 무인 편의점 앞을 지나, 빛이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졌다. 기다란 골목의 중간에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향이 점점 진해졌다. 나는 그 좁은 길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쪽 깊은 곳에, 누군가 있었다.



"... J?" 내가 물었다.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건 J였다.

"J! 너 여기서 뭐 해?" 서둘러 그에게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J는 어딘가 이상했다. 텅 빈 눈동자는 허공에 길을 잃었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J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J... 네가 미스터나인의 살인자야?"


내 물음에 J는 여전히 풀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살인자?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J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혹시... 공범이 있는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J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공범... 그렇지. 우린 최고의 콤비였어. 그 진하고 아름다운 붉은색에 내가 적절하게 터치를 올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던 J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멍청했던 거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최고의 예술가인 마냥..." 그리고 J는 미친 듯이 웃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J,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된 거야!" 그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 있잖아. 걔가 말했는데, 노을은 뜨겁게 타오르고 소멸하는 그런 게 아니래. 그저 지구 저편으로 떠오르는 해일뿐이래. 쓸데없는 의미 부여하는 내가 웃기대. 하하하하!!! 해는 내일도 뜨는데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러는 거야..." J가 마구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걔? 걔가 누군데? 누굴 말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 어, 그러게... 누구였지? 어디 간 거야? 너는 어디로 갔어? 제발 다시 돌아와 줘. 어떻게 하면 널 다시 볼 수 있지? 어떻게 하면..." J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하여 울부짖으면서,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나는 J의 팔을 붙잡았다. 시간이 흐르자 몸부림을 치던 J는 조금 진정한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J가 번뜩 눈을 떴다. 코를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 아, 아. 그렇구나..." 그는 작게 읊조렸다. 그를 따라 냄새를 맡아봤지만 주위엔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답은 내 안에 있는 거였어..."


J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분홍색의, 철제 장식품으로 보였다. 그는 손목을 튕겨 그것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을 열었다. 입으로 가져간 다음 들이쉬고,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눈동자가 선명해지고, 얼굴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밝게 웃었다.


"이제 정신이 든 거야?" 나는 안도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 나를 바라보는 게 맞나?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J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내가 아닌, 그 뒤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왜 이제야 왔어. 이제 절대... 널 놓치지 않을 거야." J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해맑았다.


순수하고 천진한, 마치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그 순간, 허벅지에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곳엔 J의 주먹이 있었고, 그 안에는 주사가 쥐어져 있었다. 뜨겁고 끈적한 무언가가 깊게 퍼지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흐려지는 감각 속에서, J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 이제는, 절대 깨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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