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 페르소나

비로소, 나

by 꿀꾀배기


"자, 이건 아주 중요한 장면이야. 이 긴 연극은 바로 여길 위해서 달려왔다고 해도 무방해. 주변에 아무도 없지? 이 순간을 아무도 방해해선 안 돼. 도구도 빠짐없이 전부 준비된 거야?"


"몰라, 다 있겠지. 사람이 오면 어때? 콱 죽여버리면 그만인걸."


"아, 정말. 그러면 몰입이 깨져버리잖아. 말투도 좀 차분하게 할 수 없어?"


"당장 때려치우고 스테이크나 먹으러 가고 싶어."


"알았어, 조금만 참아. 이 씬만 완성하면 되니까..."




E 구역의 깊은 골목. 회색 콘크리트 벽 아래 쓰레기봉투 두 개가 놓여 있고,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에너지바 포장지가 바람을 타고 바스락거리며 바닥을 구른다.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은은한 조명이 되어 어두운 거리에 스며든다. 빛을 따라 막다른 골목 안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 남성이 벽에 기댄 채 쓰러져있다. 오늘도 여전히 그의 의상은 하늘색 제복. 빳빳하게 다려진 옷과 빈틈없이 단정하게 조여진 넥타이가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몸과 대비된다. 그리고 캔버스와 재료가 준비된 이곳에 J가 등장한다.


J


(주위를 둘러보며)


이 연극이 시작됐던 그 자리에 다시 섰네.


(미동도 없는 시체를 바라보며)


난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어.




"하, 아직도? 이거 정말 지루하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럼, 네가 생각하는 정답이 뭔데?

"정답이 왜 필요한데? 시험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닌데."

"... 알았어. 그럼 이 부분은 지우고..."




J


(미동도 없는 시체를 바라보며)


난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어.


이제 깨달았어.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



J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시체의 앞에 선다.



J


(시선은 여전히 시체를 향하며)


어떤 예술은 고귀하고, 어떤 예술은 저급하고, 어떤 사람은 존엄하고, 어떤 사람은 길가의 벌레와 같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답은 모두에게 있었어. 어쩌면, 논쟁 자체가 목적이었을지도. 진실을 향한 탐구, 성취를 위한 투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


모두 아무 의미 없는, 불행의 과정이자 파멸의 결론일 뿐이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그저 쌓고, 또 쌓고...


(객석을 바라보며)


그렇다면 난 왜 고통스러울까? 내가 쌓은 모래성이 다른 사람에게 무너지는 것이 죄악스러워서? 아니면, 그 모래성이 나한테 무너질까 두려워서? 그것도 아니면, 내 것보다 높이 쌓은 상대의 모래성에 질투가 차올라서?




"뭐야,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응?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너는 어떻게 생각해?"

"... 음, 지금 배가 고파서 불행해."

"나한테 에너지바가 있는데, 이걸 먹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

"웩, 아니. 그딴 건 먹고 싶지 않아. 스테이크 먹고 싶다고!"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먹으면 행복할까? 식욕이 해소된다면 행복해질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질 텐데?"

"다시 스테이크 먹으면 되지. 빵이나."

"하지만 평생 식욕에서 해방되지는 못할 거야. 만약 식욕을 해소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지? 당장 뭐든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은데,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서있다면? 달에 너무 가고 싶은데 비용이 너무 비싸다면? 반드시 갖고 싶은 물건의 주인이 따로 있다면? 당장 오르가슴을 느끼고 싶은데 공공장소라면 어떻게 하지?"

"나는, 네가 바보 같은 생각들만 하루 종일 하니까 고통스럽다고 생각해."

"하하하, 맞는 말이야."



J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시체에게 다가간다. 시체의 앞에 주저앉아, 칼끝을 바닥에 댄다. 그리고 칼을 위로 그어 올린다. 끼기긱, 불쾌한 소리가 골목에 퍼진다. 조명이 서서히 붉게 변한다. 다시 아래로 그어 내리며 선을...




"아, 이것도 지겨워. 아직도 이깟 규칙이 중요해?"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젠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칼이 긋다 만 하나의 선은 이제 어느 원에도 갇히지 않고, 비로소 세상에 홀로 선다.



J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남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없어서 불행해. 무시당하고 핍박받아서 불행해. 거짓말에 속고 손해를 봐서 불행해. 내 세상이 너로 인해 무너져서 불행해. 너 때문에, 나는 불행해. 너 때문에, 너, 너, 너!!!


(마지막 외침과 동시에 시체의 가슴팍을 칼로 찌른다)




"이 남자 때문에 불행했던 거야?"

"응? 아니, 이건 그냥 비유야. 이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런 건 어려워. 아무튼, 이제 놀아도 되는 거지?"

"그래. 너무 어지르지는 말고."



J는 터져 나오는 핏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시체를 정성스럽게 조각한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잘라내고, 섬세한 손짓으로 구석구석 터치를 가한다.



J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은, 자유로운 세상이야. 질서도, 규칙도 없고, 속박하는 것 하나 없이, 생각하는 그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세상. 그 세상은, '너'가 있어서는 안 돼. 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거야. 비로소 '나'로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세게 휘두르면 안 된다니까."

"하하하, 배경색은 원래 과감하게, 크게 크게 하는 거야! 빨리 뒤따라오기나 해."

"어휴, 또 나만 고생이지."

"좋기만 하면서 또 싫은 척. 입꼬리나 가리시지?"

"... 난 왜 이렇게 속이 겉으로 드러날까?"



"여긴 이대로 두는 게 더 자연스러워."

"음, 그렇네. 그러면 여긴 건드리지 말고..."

"여긴 더 시선을 끌면 좋겠는데."

"그러면 첫 오픈전 때 썼던 그 기법을 이 부분에 적용해 보자."

"아, 실수로 밟아버렸다. 몰라."

"괜찮아,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어. 멋진 우연이지."



거침없이 휘두르는 붓 터치는 파도치는 물결이 되고, 날아오르는 새가 된다. 조명은 너울 치는 파도에 번지며 조금씩 보라색으로 변한다. 금빛을 수놓은 모래사장에는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다. 영롱하게 일렁이는 얕은 바다에도, 광장에도. 붓이 그려낸 아름다운 보라색 세상 안에는 J만이 홀로 우뚝 서있다. 분홍색 흡연 기구를 꺼내 입에 물고, 뿌연 연기를 내뿜는다. 무대에 장미 향이 오묘하게 퍼진다. 사랑스럽고 포근한 꽃잎과 버터, 무겁게 가라앉는 젖은 풀과 흙, 화하게 쏘는 스파이스와 마른 원목.



J


(만족한 듯 약간 풀린 눈과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로)


이 연극은 끝나서는 안 돼. 영원히 기억될, 클라이맥스로 가자.




"정말? 이제 스테이크 먹으러 가는 거야?"

"그래. 다음 씬으로 가자."

"이제 지겨운 거 다 끝난 거지?"

"맞아. 이제부턴, 대본 없이 할 거야."



보라색 조명과 뿌연 안개가 무대를 뒤덮고 J는 퇴장한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멀리 들려온다.





이전 17화36.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