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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의 별 Jul 15. 2021

회사였지만 사람을 먼저 생각하였던

© 089photoshootingsphotography, 출처 pixabay


한 달간의 웹에이전시의 파견 생활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간 나는 내가 일을 하게 되는 책상으로 안내를 받았다. 중소기업이어서 회사 규모는 크지 않았다. 남자 직원이 20명 정도 여자 직원이 30명 정도 되었다. 조금 특이한 점은 그때는 산후 휴가나 육아휴직을 받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대였는데도 경력이 오래된 여직원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회사에 복지가 3개월 산후 휴가를 받을 수 있었고 1년 정도 무급이지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아이가 어릴 때는 재택근무도 가능했다.


외국 계열회사에서 임원까지 근무하다가 퇴직한 분들이 세운 회사여서 그런지 복지가 유럽 회사들과 비슷했다. 개인회사가 아니고 주식회사라고 늘 웃으면서 부장님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회사로 출근한 나는 내 책상을 소개받아서 가고 있는데 직원들 책상이 있는 곳을 한참 지나서 키가 큰 파티션이 벽처럼 되어있는 어느 지점에 이르렀다. 세상에나, 나 혼자 독방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웹디자이너가 없이 웹에이전시에서 회사 홈페이지를 관리를 하다가 급하게 수정할 때나 새로운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은데 빠르게 처리가 안되어 너무 불편해서 웹디자이너를 고용하게 되었는데 일반 사무직원들과 웹디자이너는 성향이 다르다고 들었다면서 그 방을 따로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분들이 들었던 웹디자이너의 성향은

혼자 조용히 독립된 공간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며 본인이 작업하는 과정을 누군가가 볼 수 있는 환경을 정말 싫어한다.



© StartupStockPhotosphotography, 출처 pixabay


그러한 이유로 키가 큰 파티션을 마련해 거의 벽처럼 만들어 놓고 일반 사무직원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스캐너와 전화, 컴퓨터 등등 모든 사무기기를 그 안에 넣어놓았던 것이다.



나의 성향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작업하는 것을 어느 누구든 와서 보고 참견해도 된다!

그 벽처럼 생긴 파티션 안에서 일하는 동안 너무 외로웠던 나는 결국 며칠 만에 거의 울먹이면서 파티션을 치워달라고 했다. 결국 파티션도 치우고 내 책상의 위치를 사무직원들 옆으로 붙였다.



알뜰한 실장님이 야근할 때 저녁 식사비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500원짜리 어묵 하나 먹고 일을 한 것을 알게 된 사장님과 부장님들은 그녀를 걱정하고 나무랐다. 40대였던 그들의 마음을 지금 40대인 내가 이해가 된다. 정말 건강이 제일인데 거의 굶으면서 일하는 것이 걱정되었으리라.



그 후 야근을 하게 되어서 저녁을 회사에서 먹게 되면 저녁 식비를 회사에서 지급하지만 회사 비용으로 따로 저녁식사를 주문해서 먹게 되었다. 그리고 임신한 여직원이 있게 되면 저녁식사는 정말 화려했다. 중간에 간식도 너무 푸짐해서 입이 짧고 소식을 하는 나에게는 먹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그 시절은 결혼해서 임신을 하게 되면 회사를 대부분 그만두어야만 했었는데 조금은 유별난 회사였다. 사무직은 컴퓨터와 전화만 있으면 업무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아이 낳기 전에도 재택근무가 가능했다.

또한 재택근무를 하게 되는 직원이 집에 컴퓨터가 없을 때는 회사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였다.


야근을 하게 되면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꼭 챙겨주었다. 토요일 근무가 격주로 있던 시절이었는데 주말 근무여서 평일 근무보다 더 계산해서 수당을 받았다. 근로기준법을 정확하게 지키는 회사였다.



회식 때 간식시간이나 저녁을 먹을 때 사장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2000년도에 40대 중반 정도 되는 나이인 그의 어린 시절은 미군 장갑차가 지나가면 "초콜릿"이라고 말하면서 따라다니면서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사장님은 직원들이 좋은 음식으로 잘 먹어야 했다. 그가 외근을 나갔다가 들어올 때는 간식을 너무 많이 사 와서 남자 직원 몇 명이 나가서 함께 들고 와야만 했다.



회식도 저녁에 하지 않고 점심에 일식집을 예약해서 하곤 하였다. "저녁은 가족과 함께!"를 외치는 회사였다. 외국 회사들과 연락을 많이 하는 업무 특성상 직원들이  가끔 야근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정확한 야근 비용과 택시비로 미안함을 전했다.



2002년 월드컵 때 미국과 한국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근무시간 때 경기가 있어서 많이 아쉬워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회사에서 호프집을 빌려서 경기 시간에 맞추어서 모두 그곳으로 갔다. 업무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장님과 부장님들은 직원들에게 호프집을 선물했다.


© 12019photography, 출처 pixabay


우리는 뜨겁게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행복한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경기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들은 조금 알딸딸한 상태로 근무하게 되었다. 호프집 축제 후에 바로 퇴근하면 좋았겠지만 그때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퇴근시간까지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한 추억을 가지게 된 우리들은 일하는 것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결혼 후 신혼집을 신랑 회사 부근에 얻게 되어서 광화문에 있는 내 회사로 출퇴근이 왕복 5시간이 걸렸다. 3년 동안 출퇴근을 하다가 내가 임신했을 때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말을 했지만 웹디자인 업무는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지 않냐고 그때부터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아이 낳고 산후 휴가를 마치고 나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내가 키워야 한다고  회사 복귀가 힘들 것 같다고 말을 하니 지속적인 재택근무를 권하였다. 물론 내가 일을 하는 업무는 그대로였으나 시간이 유연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버틸만하였다. 나는 그렇게 오랜 기간 재택근무를 하였다.



회사였지만


사람을 먼저 생각하였던 그곳은


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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