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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의 별 Dec 04. 2020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스승의 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지구별 여행

산들거리는 바람이 뺨을 가볍게 스치며 꽃향기가 기분 좋게 흔들거리면서 퍼지던 어느 5월, 나의 교생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모교에서는 내 과목의 수업의 자리가 없다고 해서 교육실습을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어느 정도 교육실습과목을 포기하고 있을 때 나의 대학에서 어느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에 교육실습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나를 포함해 12명의 교생들은 그 학교로 배치를 받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고등학교였고 기숙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와 등교 거리가 멀어서 기숙사에 신청해서 거주한다고 했다.
등교 첫날 교무실에서 교장선생님이 학과목 선생님들께 우리들을 인사시켜 주었고 아침 조회 때 학생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생들은 과목별로 지도 선생님을 따라서 각각 배치받은 반으로 흩어졌다.


나는 지도 선생님을 따라 1학년 9반으로 함께 들어갔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전부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여중, 여고, 여대 출신인 나는 한꺼번에 나를 보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보니 고등학생답지 않게 어려 보이고 귀엽기까지 했다.


내가 수업을 하려고 들어오면 분명 지도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 안 하고 말썽을 피울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해 주신 거와는 달리 수업 시간 내내 아이들의 수업태도가 너무 좋았다.
내가 질문하는 것에 답변도 잘해 주고 문제를 내면 서로 맞추려고 손도 들어주고 해서 나의 수업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 지도 선생님께 미리 허락을 받은 나는 아이들과 더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내 도시락 가방을 들고 우리 반으로 올라갔다.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 가방을 열고 있던 아이들이 매우 놀라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우리 점심 같이 먹자! 밥을 함께 먹어야 친해지지"라고 말하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시락을 꺼내서 함께 먹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이내 곧 나와 자연스럽게 익숙해져서 나는 한 달 동안 아이들의 모둠을 돌아가면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아이들과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 운동장 곳곳에 스케치하러 나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마침 내가 수업이 없는 시간이어서 미술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미술수업을 참관하게 되었다.
두 시간 정도의 미술 수업에 나는 아이들이 스케치를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는 살짝 도와주기도 하면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나갔던 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두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미술 선생님께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예쁜 5월이라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도 춥지도 덥지도 않고 살랑거리면서 기분 좋았다.
나는 미술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매번 우리 반 아이들의 미술 시간을 참관할 수 있었고 나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 시간을 왠지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내 수업 시간보다는 봄 햇살이 너무 예쁜 야외에서 자연을 보면서 스케치를 하는 미술시간이 나와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친해지는 느낌을 아이들도 받은 것 같았다.


한 번은 매우 급하게 전달할 내용이 있어서 내가 교실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있다. 그다음 시간이 체육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이 체육복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덜컥 교실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내 귀에 날카롭게 들려왔다. 내가 보기엔 분명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이들은 씩씩한 남자아이들 답지 않게 호들갑이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우리 지금 옷 갈아입고 있는데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단체로 말을 했다.


나는 "미안해! 그런데 급하게 전달할 상황이야"라고 말하며 나는 꿋꿋하게 전달할 내용을 말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아이들의 원성이 끝나지를 않았다.

분명히 위에는 체육복을 대부분이 입고 있었고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왜 반바지는 입고 있잖아요!"라고 말하니 아이들이 "이건 반바지가 아니고 팬티잖아요! 선생님은 모르세요?"라고 말해서 나는 매우 당황하였다.


하지만 꿋꿋하게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는 말했다.

"선생님은 남동생이나 오빠가 없어서 몰라, 미안해요 정말!"이라고 말이다.


아이들은 나와 대화하는 그 사이에도 급하게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교실을 나온 나는 교생 실로 내려가 이 이야기를 하니 다들 웃으면서 배꼽 잡고 뒤로 넘어갔다.
나 역시 생각할수록 민망한 사건이었고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아이들과 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겪고 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친해질 수 있었다.
스승의 날이 곧 다가왔다. 학교에서는 교생들에게 그날은 학교로 출근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나는 스승의 날에 출근을 안 하고 하루 푹 쉬고 개운한 마음으로 그다음 날 등교를 하였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여러 가지 색상의 종이 조각이 한꺼번에 뿌려졌다.
그러면서 한 아이가 꽃을 내밀고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스승의 날' 노래를 합창을 하였다.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 나는 스승의 날 노래를 들으면서 이내 알 수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감동이 몰려오면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노래가 다 끝났을 때 아이들이 "왜 어제 학교 안 오셨어요! 기다렸어요!"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꽃다발을 내게 준 아이가 말하기를 꽃을 어제 가져왔는데 시들면 안 되어서 기숙사로 가져가 물을 밤새 갈아주면서 보살피고 가져왔는데도 조금 시든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 말했다.

아마도 그 아이가 기숙사에 거주해서 꽃을 맡기로 한 모양이다.

나는 웃으면서 꽃이 싱싱하고 예쁘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나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선생님 선물 고르느라 우리 정말 힘들었어요! 여기서 풀지 마시고 집에 가져가셔서 혼자 보세요!"라고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진 나는 "왜 선물은 주는 사람 앞에서 풀어야 하는 거예요"라고 말을 하니 아이들이 단체로 쓰러지면서 "안돼요!"라고 말을 했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지만 호기심 많은 나는 참지 못하고 포장지를 풀었다. 내가 포장지를 풀 때마다 아이들은 소리 지르면서 말렸고

나는 웃으면서 "지금 꼭 봐야겠는데요!"라고 말하면서 박스를 개봉해서 꺼내보았다.

가느다란 끈이 달린 핑크색 실크 잠옷이었다. 옆선이 길게 찢어져 있어서 활동하기도 좋아 보였다.

마음에 들은 나는 들어서 펼쳐 보이며 이쁘다고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선생님 혼자 계실 때 풀어보시라니까요"라는 원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는 웃으면서 "왜 뭐가 어때서 예쁜 잠옷인데, 고마워!, 얘들아"라고 말을 했다.

그제야 아이들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여자 속옷을 파는 가게에서 어떻게 선물을 골라야 할지 잘 몰랐던 아이들은 친구 중 대학생 누나 한 명을 섭외해 그 누나가 골라주는 것을 산 것이다.
아이들 말로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누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래야 나에게 알맞은 선물을 고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아이들이 말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 돈을 모아 꽃다발과 선물을 준비한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또 스승의 날 학교에 오지 못한 나로 인해 밤새 기숙사에서 꽃다발을 보살핀 그 아이의 마음도 고마웠다.

나에게 예쁜 잠옷을 선물하고 싶어서 친구의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내 선물을 힘들게 골랐을 그 아이들의 소중한 마음이 너무나도 많이 고마웠다.

이걸 받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지도 선생님께서 받아도 된다고 말씀하셔서 고맙게 받기로 했다.







나는 교육실습을 마치고 교직과 상관없는 길을 가게 되었고 그 아이들을 만난 지 벌써 22년이 흘렀다.



그날이 나에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준 나의 첫 제자들이었고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준 나의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사랑을 나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인 그들이 어디에서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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