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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의 별 Nov 30. 2020

제자를 대학에 보내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

행복을 찾아 떠나는 지구별 여행

독일 유학 생활을 IMF로 인해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 귀국을 한 나는 대학 4학년에 복학을 했다.
독일 대학은 우리나라 대학 3학년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아주기에 나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유학을 갔었다. 오히려 중도 귀국한 나에게는 대학생활 1년이 남아있는 것이 더 마음 붙일 곳이 있어서 나았던 것 같다.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비사범계열이었지만 교육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했다. 그건 전적으로 나의 엄마의 권유였고 나의 의사와는 별개였다.


대학 4학년으로 복학을 했을 때 교육실습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의 모교에 연락을 해보니 내 과목의 선생님의 자리가 꽉 차서 더 받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나는 다른 고등학교를 알아보았지만 본인 고교 출신이 아닌 교생을 쉽사리 받아주기 어려워했다.



교육실습을 나가기 어렵게 된 나는 그러면 교육학 이수가 제대로 안 되겠다고 거의 반쯤 포기했을 때 대학에서 학과장님이 잘 아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육학을 이수하고 있지만 교육 실습할 곳을 정하지 못한 학생 전부를 실습받을 수 있게 기회를 주셨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꽃내음이 만발했던 나의 교생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낯선 도시의 남자고등학교에 여자 교생들 12명이 배치받았다. 첫날 학교로 등교하는데 나는 대학 후배들과 함께 교육실습을 해서인지 더 어색했다.

그 후배들과 얼굴은 알지만 친하지 않았고 매우 서먹서먹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었고 학교 안에 기숙사도 있었다.
그 기숙사는 학교와 통학하기 아주 어려운, 그 지역에서 교통이 불편한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신청해서 거주한다고 했다. 학교 규모는 꽤 커서 조금 겁이 났다.



등교 첫날 교무실에서 교장선생님이 학과목 선생님들께 우리들을 인사시켜 주시고 아침 조회 때 학생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생들은 과목별로 지도 선생님을 따라서 각각 배치받은 반으로 흩어졌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1학년 9반 아이들과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어색해하면서도 그 웃음이 매우 귀여웠다.



남자고등학교라서 교생들이 마음 편히 쉬지 못할까 봐 학교 측의 배려로 교생실을 따로 크게 두 곳을 마련해 주셨다.
수업이 없을 때는 그 공간에서 학습 준비도 하고 지도 선생님이 주신 사진이 포함된 출석부 복사본으로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외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여대에서 온 12명의 교생 선생님들이 신기한 듯 질문도 많았고 또 귀엽게 붙임성도 좋았다.
고등학생들이라서 속으로는 말 안 들을까 봐서 겁을 먹고 간 나는 순수한 아이들을 보면서 반성했다.



등교한 지 며칠째 되었을 때 그 학교 독일어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긴장을 하고 교무실에 갔는데 선생님께서 고3 아이 두 명을 내게 부탁하셨다.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생님께서 나에게 고3 아이 두 명을 위한 독일어 회화 수업을 따로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선생님은 매우 어렵게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고등학교는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였다. 시골이라고 다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닌데 그중에서 대학에 붙어도 학비를 대 주기 힘든 집들이 꽤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고1 때부터 아이들이 어떤 걸 잘하는지 보고 따로 전국 경시대회나 국가 공인 자격증을 따게 도와주어서 장학생으로 대학을 보내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부탁하는 고3 아이 두 명은 외국어 경시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이었고 몇 번 나갔었는데 문법과 독해 실력은 매우 뛰어나게 나왔지만 듣기와 말하기 점수가 100점 만점에 40점 대라서 이 점수 가지고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하기 어렵다고 했다.



교육실습에 관한 수업이 아니고 따로 수업을 부탁해야 돼서 너무 죄송하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본인은 문법과 독해는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줄 수 있지만 독일어 회화와 듣기는 잘 가르쳐 주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나는 새파랗게 어린 교생에게 한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본인이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고3 제자들을 내게 부탁하는 그 용기와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교육실습을 하는 한 달 동안 나는 내 수업 시간이 비는 그 시간에 고3 아이 두 명을 가르쳤다.


그 고3 아이들은 나에게 독일어 회화 수업을 받으려고 내 시간에 맞춰서 교생실로 내려왔다.
그렇게 한 달을 하루에 3~4시간 정도 매일 독일어 회화 수업을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수업시간 내내 독일어만 말하게 했다. 나 역시 독일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내가 내주는 숙제를 빠짐없이 열심히 해 왔다.



교육실습을 마치게 되는 그 시기에 고3 아이들은 전국 외국어 경시대회를 나가서 한 명은 전국에서 2등, 또 한 명은 전국에서 4등을 했다. 회화와 듣기 시험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내었다고 했다.


너무 크게 기뻐하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내 대학의 전공 교수님들과 교생들 그리고 고등학교 선생님들께 식사 턱을 내셨다. 나는 입이 짧아서 전혀 먹을 수 없는 추어탕이었다.



전국에서 2등이라는 점수를 낸 아이는 소위 SKY 대학 중 한 곳에 서양 어문학부 4년 장학생으로 입학이 확정되었고, 전국에서 4등을 한 아이는 한 수도권의 국립대학교 서양 어문학부 4년 장학생으로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나는 내가 독일어를 잘해서 또 잘 가르쳐서 그 아이들이 대학에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1 때부터 그 아이 두 명을 위해 본인의 시간을 할애해서 독일어를 따로 가르치고
매번 전국 외국어 경시대회를 알아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시험 보러 다녀오는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지니신 독일어 선생님의 열정과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고1 때부터 꾸준히 선생님을 믿으면서
본인의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 왔던 두 아이의 꿈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런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 당시 선생님이었다면 개인 시간을 포기하고 꾸준히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었을까...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낯선 교생에게 나를 낮추고 내가 못하는 점을 말하면서까지 내 제자를 부탁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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