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라하의 별 Dec 09. 2020

내 동생과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이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지구별 여행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나의 집이 떠올려질 때 내 집은 부자였던 것 같다. 띄엄띄엄 있는 기억이지만 집도 매우 컸으며 운전기사 아저씨도 있었고 집에서 일하는 언니들도 있었다. 지금은 중년 연기자로 나오는 분들과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곳은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였고 행사 때 와서 사장님 딸이라고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던 기억과 사진이 남아있다.



엄마, 아빠는 늘 바빴고 나는 집에서 일하는 언니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빠와 친구이며 아빠 회사의 돈 관리를 담당했던 그 사람이 마음을 먹고 돈을 횡령해 해외로 도망을 가서 아빠 회사는 부도가 났다. 지금 같으면 국제경찰과 협력해서 그 사람을 잡았겠지만 80년대 초인 그 당시는 그냥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갔다.



작은 양옥집들이 많은 동네였는데 엄마가 아는 사람의 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살았다.
아빠와 엄마는 다시 재기하려고 열심히 돈을 벌러 밖으로 나갔고 나와 동생만 늘 단 둘이 있었다.



낯선 동내였지만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나와 동생은  처음으로 그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놀았다.
동생과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동생이 배고프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는 손에 잡히는 데로 이것저것을 꺼내어 만들었다. 예전에 집에서 일하던 언니가 요리하던걸 기억하면서 "호떡"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밀가루에 물만 섞어서 반죽이 되었을 때 익히려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넣었다.



처음으로 해 봤던 나는 기름이 얼굴에 튀어서 너무 뜨거워 울었다. 마침 엄마가 집에 와서 나를 발견하고 수습을 했지만 오른쪽 눈과 코 사이에 기름이 튀어서 흉터 비슷하게 생겼다고 지금까지 엄마가 마음 아파한다. 아주 작은 크기로 데인 거고 크면서 많이 흐려져서 나도 잘 안 보이는 흉터가 엄마 눈에는 아주 크게 보이나 보다.



동생과 나는 부모님 없이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책들은 다 빨강 종이가 붙은 채로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서 나에게는 책이 없었다.



동생이 심심해하면 내가 기억하는 책들의 이야기를 나는 매일 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고 동생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 좋아했다.


항상 늦게 들어오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엄마, 아빠 없는 시간을 서로 의지하면서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나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동생이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싫다고 따라오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 한해만 학생수가 많았고 학교수가 적어서 한 교실을 오전 반, 오후 반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다. 나는 오전에 학교 갈 때도 있었고 또 오후에 학교 갈 때도 있었다.


오전에 학교 갈 때는 동생이 자고 있어서 무사히 혼자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오후 반이 되면 동생과 놀다가 학교에 가야 하는데 동생이 울면서 따라왔다.



내가 살던 집과 학교는 상당한 거리였다. 마을버스가 있었는데 다섯 정거장이 되는 거리였다.
동생이 있어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는데 동생 보고 집에 가라고 돌려보내고 내가 다시 걸어가면 집으로 가는 척했던 동생이 다시 나에게 걸어왔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결국 동생이 나를 따라 학교까지 오면 다섯 살인 동생을 혼자 집에 가라고 보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동생과 함께 교실로 들어가면 담임선생님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동생을 내 옆에 앉게 해 주었다.
선생님이 동생이 할 만한 것을 주면 동생은 좋아하면서 열심히 그것을 하고 나는 수업을 받았다.



나는 동생이 놀림당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친구들이 나와 동생을 놀리지 않았고 우리는 그곳에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었다. 나와 동생은 꽤 오랫동안 학교를 함께 다녔다.



어느 날 엄마가 집에 조금 일찍 왔는데 동내에서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없어서 찾으러 다녔다.
여기저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데 나와 동생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엄마가 반가운 마음에 우리에게 뛰어왔다.
동생은 하드를 먹고 있었고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프라하의 별! 동생을 어디서 만난 거니?"라고 물었다.



"만난 거 아니야, 나랑 학교에 다녀왔어"



"아니 어떻게?"



"동생이 학교 안까지 따라와서 혼자 집에 가라고 말 못 했어" 

라고 나는 말했다.



그 후로 엄마는 동생에게 언니 따라서 학교 가는 것을 못 하게 하고 동내에서 친구들과 놀도록 했다.


그래도 동생은 언제나 마을버스가 서는 곳에서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렸다.



나는 동생이 좋아하는 하드를 사주고 싶어서 엄마가 왕복 버스비 100원을 주면 학교 갈 때만 버스를 타고 가고 집에 올 때는 다섯 정거장을 걸어왔다.



그때 동내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함께 걸어주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친구들과 재미있었다. 우리가 거의 도착하면 동생이 내게로 뛰어와 안겼다.



나는 동생을 안아주고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가서 동생에게 하드를 사주었다.
동생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하드를 맛있게 먹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부모님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동생과 나는 함께 한 시간이 많은 그곳에서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언니가 학교에서 오기만을 기다리던 다섯 살 꼬맹이 동생은 지금은 무조건 언니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두렵지 않은 용기를 주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힘이 된다.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낸 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이 되었다.



그리고 동생을 교실로 데려오던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고맙고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워 하는마음이 힘이 되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