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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Dec 08. 2020

우리의 틈

  얼굴이 희었다. 양쪽 볼과 턱에 움푹 팬 여드름 흔적이 잔뜩 했지만 피부색이 고와서 밉지 않았다. 코끝이 둥근 데다 입술이 작고 통통해서 그런지 남들 눈에는 순하고 착한 인상이라고 했다. 나는 첫눈에 안경 속 그의 눈매가 매섭다는 걸 알아챘다. 빈틈이 없고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라 허술한 나와는 너무도 달랐지만 우리는 7년간 애틋했다. 손만 잡아도 가슴이 떨렸고 거리를 좁혀 앉을 때 풍기는 그의 냄새가 편안했다. 항상 바쁜 사람이지만 결혼을 하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당연히 그래야 했다. 


 결혼을 3주 앞둔 날, 양가 어머니 맞춤 한복을 찾던 날이었다. 큰 병원에서 내 아버님이 되실 분께 다발성 간암 판정을 내렸다. 팔을 다쳐 검사했는데 간암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기쁜 날이었지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기에 우리는 결혼식과 그 이후의 일들을 그저 엄숙히 치러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된 그는 아버님을 모시고 수시로 서울을 왕복하며 통원치료를 받게 해 드렸다. 색전술은 처음에 효과가 있는 듯 보였지만 암세포는 질기고 집요했다. 결국 남편이 아버님께 간 이식을 해 드리기로 했다. 그때 내 뱃속 쌍둥이는 6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 아는 병이라서 괜찮다던 입덧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뭐라도 먹어야 아기가 클 텐데 음식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억지로 라면을 끓여 입에 밀어 넣으며 시계를 보니 병원에서 대기 중인 남편이 곧 수술방으로 올라갈 시간이었다. 입덧도 사치다 싶었다. 설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을 꺽꺽 토해냈다. 


출처: 픽사베이


 대한민국 간 명의라더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배를 열고 간을 3분의 2나 떼 낸 사람도, 받은  사람도 의식을 찾고 하루하루 회복하고 퇴원했다. 나도 조산의 위험이 조금 있었지만 무사히 아이들을 만났다. 2킬로대로 태어난 그 조그맣고 못생긴 녀석들을 데리고 처음 집으로 온 날, 아버님은 침대에 누우신 채로 가만히 내려 보시더니 아기가 예쁘다고 하셨다.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시는 듯 보였다. 공장에도 나가시고 장거리 이동도 하시며 공장 일을 다시 챙기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쌍둥이 백일. 아버님은 간암 재발 판정을 받으셨다. 희망은 그렇게 감질나게 왔다가 가버렸다. 온 식구가 코가 빨개져서는 쌍둥이 백일을 축하하며 울었다. 그때 찍은 아버님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아버님은 새 간으로 꼭 일 년을 살다 가셨다.


 나는 집에 쌍둥이와 함께 남겨졌고, 남편과 어머님은 아버님이 안 계신 바깥세상에 내쳐졌다. 때가 되면 돌아올 어음과 각종 대금을 처리해야 했고, 아버님이 하시던 인삼 농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책상에서 논문을 뒤적이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사람이 대형트럭을 몰고 차광망을 배달하고 인삼밭에 가서 농약을 쳐야 했다. 빠르면 이삼일 안에 오기도 했지만 길면 열흘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가고 나면 삼일 정도 아빠를 찾으며 울지만 그 이후엔 아빠를 찾지 않았다. 체념한 것이다. 베이비시터 도움도 받고 친정엄마도 매일같이 오셔서 도와주셨지만 나는 우울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이 반갑고 살 떨리게 좋았지만 예쁜 말도 따뜻한 표정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과 어머님은 늘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기가 울어도 안아 줄 시간이 없었다. 대출이 많다고 했다. 한 달에 감당해야 할 대출 이자가 몇 백씩 된다는 데 나는 그게 얼마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음 달에 바로 돌아올 어음을 막지 못하면 공장이 위태롭다고도 했다. 시작과 끝은 모두 돈이었고, 십 원 한 푼 보태지 못하는 나는 무력했다. 남편은 밖에 나가 부딪치는 세상이 너무 야멸차고 비열하다며 집에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 내게는 감옥이었고 예쁜 아기가 내게는 족쇄 같았는데 그에게는 그저 투정일 뿐이었다. 분명 귀로 듣고 입으로 하는 말인데 서로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 막을 가운데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운함과 오해는 쌓여갔다. 아침에는 그가 벗어 놓은 땀과 농약에 전 옷을 빨며 안쓰러워 울고도 밤이 되면 나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러워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푸념만 하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악순환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틈은 벌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나는 원망할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예민하고 배려심이 부족한 그의 성격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 사이로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에게 닿으면 몸의 잔털이 곤두섰다. 함께 있을 때는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었고, 일을 하러 나가 집을 비우면 있지도 않은 사람을 비난하며 끝없이 분노했다. 나는 분노를 연료 삼아 아이를 키우는 기계였다.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한 건 역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듯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쌍둥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한낮에 둘이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서먹하게 애들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그가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동안 당신 고생 많았어.” 순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흘러서 내 몸을 다 녹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 닦은 냅킨을 구기며 뭐라 할 말을 찾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가만가만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는 동안 한마디 말이 필요 없었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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