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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Dec 08. 2020

잡초처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세 아이들을 모두 기관에 보내고 돌아와서 나는 고행하듯 집을 치웠다. 나는 그 행위를 ‘폭탄 제거’ 내지는 ‘지뢰 제거’라 이름 지었다. 단순히 바닥에 늘어진 것들을 집어 들어 제자리를 찾아주는 정리정돈과는 차원이 다르다. 조금이라도 방심할라치면 나는 고급 레고가 선사하는 고강도의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고, 무엇인가는 내 발에 밟혀 납작해졌다. 나는 이 느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 느낌은 공포에 가깝다.


출처: 픽사베이


 열대여섯 무렵 가을 저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거실을 지나가는데 발바닥 쪽에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터지는 느낌이 났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방심하며 깨문 미더덕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육수가 내 입안을 공격했을 때처럼 당혹스러웠다. 내키지 않았지만 발을 들어 확인해야 했다. 제법 통통했을 귀뚜라미 한 마리가 온몸의 수분을 모두 내어놓은 채 납작해져 있었다. 의도치 않게 생명을 해쳤다는 죄책감과 함께 나는 발바닥에 닿는 모든 것에 공포를 느끼며 한 여름에도 양말을 벗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런 나에게 놀이방 정리는 힘든 일이었다. 아무것도 밟지 않고서는 그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죽어도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느낌들에 무뎌져 가며 나는 아이들이 기관에 간 사이 우렁각시처럼 집을 깨끗이 치워놓는 엄마가 되어갔다. 


 정리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를 뽐내는 것은 은물 정리였다. 아이들은 색색의 조그만 조각들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냈고, 아이들이 작품이라고 부르는 ‘예쁜 쓰레기’들은 넘쳐났다. 색깔도 종류도 모양도 다른 그것들을 정리하노라면 두 세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그중에 ‘10 은물’은 손톱만 한 주제에 뽑아도 계속 올라오는 잡초처럼 질기기 짝이 없었다. 이 비싼 애물단지를 교구랍시고 사들인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견디다 못해 은물 정리를 남편에게 맡기기도 해 보았지만 그 비싼 교구를 진공청소기로 모조리 빨아들이는 걸 보고 기함하여 포기했다. 대체 왜 치우는 행위는 끝이 없는가? 대체 왜 아이들은 어지르고 또 어지르는가? 대체 왜 나는 방 하나 치우는 일로 아이들을 미워했다 나를 미워했다 하는 것일까?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싸우는 식물’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잡초 씨는 땅속에서 발아할 기회를 기다린다. 잡초를 뽑으면 땅이 뒤집혀 종자가 햇빛을 받게 된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잡초를 뽑아 주위 식물이 없어졌음을 나타내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잡초 씨는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앞 다퉈 싹을 틔운다.’


출처: 픽사베이


 이를테면, 내가 놀이방을 치우는 행위가 아이들에게는 다시 어지를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기관에 다녀오면 엄마가 새하얗고 깨끗한 도화지를 꺼내 주니 마음껏 그리는 수밖에 달리 무슨 도리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엄마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숨을 쉬고 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을 좀 더 청결하게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돌봄을 받고 자랐듯이 이 아이들도 나의 돌봄을 받고 자라고 있을 뿐이다. 잡초가 자라는 것도, 아이들이 제 영역을 어지르며 노는 것도 다른 게 아니다. 그저 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하루를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 10 은물은 우리 아이들 손에서 해바라기 씨앗이나 소나기, 아니면 그 무엇이든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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