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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l 16. 2024

헤밍웨이의 아침

아들학개론- 아들보다 발이 낫다.

“할아버지는 제게 자명종 같아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소년은 노인에게 아침에 깨우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전 주인아저씨가 깨워 주는 게 싫어요. 제가 그 사람보다 못난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네 기분을 알다마다."

노인은 아프리카 꿈을 꾸고 난 새벽, 소년을 깨우러 간다. 노인은 달빛 속에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고 소년이 자신을 볼 때까지 한쪽 발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자신을 보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밍웨이는 문학계의 상남자다. 아프리카에 가서 코뿔소와 사자를 총질로 때려잡고 남의 나라 전쟁터에 뛰어들며 걸핏하면 화를 내고 주변과 싸웠다. 그러나 매일 글을 썼고 파멸할 망정 패배할 수 없다며 자신과 싸워 승리했다. 이 상남자는 남자를 다룰 줄 안다. ‘이 게으름뱅이야! 일어나!’ 하고 거칠게 어깨를 흔들지 않고 다정하게 발을 만져 잠을 깨운다. 아들의 두 얼굴일까. 까칠하고 무모한 싸움꾼이지만 자기를 인정해 주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등을 구부리고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말랑하고 약한 내면을 가진 남자. 나는 내 아들을 이에 맞게 대접하고 있을까.


현 언니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우리 사이에 화제였다. 4살에 한글을 깨쳤고 7살 때부터 6학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한 바닥씩 썼다. 언니는 그 일기장들을 링고리로 묶어 보관해 두었다. 아들 치고는 드물게 책을 즐겨 읽고 좋아하는 책은 반복해서 읽었다. 엄마의 태양으로 사랑과 기대를 온통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회사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부를 때만은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코에 잔뜩 힘을 넣고 “애기쏴람~, 오늘은 무뜬 일이 있똔고야?”하고 불렀다. 현언니의 이모는 그러다 장가갈 때도 애기사람이라고 하겠다며 혀를 찼다.

애기사람은 중2가 되자 미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미국이 테러 위험, 폭동 등으로 시끄러운 때였고 귀한 외아들이 혼자 미국을 가다니 말도 안 되었다. 아들은 고집을 부렸다. 몇 날 며칠을 떼를 쓰고 주장하여 겨우 타협한 곳이 유럽이었다. 현언니는 비행기표를 사고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혼자서 기차를 알아보고 넉살 좋게 민박에도 형들과 잘 부대낀 후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야무지게 챙겨 먹고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역시 보통 놈은 아니었다.

현언니의 아들은 학원을 잘 다니고 학교공부도 곧잘 했다. 학원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더니 고2가 되자 이제 학원은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고3이 되자 자기 혼자 공부하겠다며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언니는 속이 바싹 탔다. 고3이면 다들 시각을 쪼개서 공부한다고 야단인데 아들은 느지막하게 일어나 집에서 공부했다. 싸워보고 혼내봐도 내 인생이라고 아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현언니는 멈추고 생각했다. 욕을 하고 때려서 이놈을 격파해야 할까. 좋은 말로 타일러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아들 인생은 아들의 것이 맞았다. 언니는 아들과의 관계를 지키기로 했다.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언니는 자고 있는 고3 아들의 큼직한 발을 문지르고 누르며 혀 짧은 소리로 아들을 깨웠다.

“애기싸람~ 잘 자떠요~ 시원해?”

웅~ 하고 아들은 실실 웃었다. 키는 멀대처럼 크고 다리에 털이 숭숭 났지만 엄마 눈에 비친 아들의 얼굴엔 아기 때의 모습이 있었다. 많이 달라졌지만 엄마의 사랑스러웠던 아기사람이 분명했다. 쭈까쭈까를 해주면 기분 좋게 기지개 쭉 켜며 있는 대로 작은 몸을 펼치던 아기의 하얗고 보송한 얼굴이 시커먼 녀석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학교 가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발마사지로 기분 좋게 아침을 맞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은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다가 부스스 일어나 세수를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과 엄마는 고3이라는 큰 산을 그렇게 넘었다. 학교를 가지 않아 현언니는 담임선생님께 죄송하다 양해를 구해야 했지만 언니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들과 충돌 없이 고3을 겪어내며 긴 항해를 함께 마친 선원처럼 큰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언니는 아들의 마음을 얻었다.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서로를 볼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학원의 도움 없이 아들은 서울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현언니도 의견은 냈지만 진로도 전적으로 아들이 정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아들은 그 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 전과하려고 공부를 한다. 본인의 결정이므로 책임도 본인이 진다.

아직 아들이 갈 길은 멀지만 현언니는 그 길의 근처에 얼쩡거리며 든든히 뒤를 받쳐 줄 것이다.


현언니는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까? 소년을 흔들어 깨우는 주인아저씨에게 내가 못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을 알았을까? 다정하게 아침을 깨우는 사람, 나를 존중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소년에게 어떤 마음을 들게 할까.

왜 이들은 발을 택했을까. 사람의 몸에서 가장 낮게 있고 머리에서 먼 발. 의식에서 가장 먼 내 몸의 일부에서부터 밀물이 밀려오듯 서서히 잠으로부터 소년을 불러오고 싶었을까. 어쩌면 상남자 헤밍웨이가 깨워지고 싶은 방식이었는지 모르겠다.


노인은 고기를 잡느라 바다와 싸워 기력이 다했다. 소년은 아기처럼 엉엉 울면서 노인을 위해 커피를 가지러 돌길을 달려간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뜻밖의 눈물 포인트다. 헤밍웨이는 남자를 잘 알고 섬세하게 그려준다. 배고픔을 까맣게 잊고 포기를 모르고 바다와, 사냥감과 싸우지만 낚시줄에 앉은 물새, 내가 잡을 사냥감에도 공감하고 친구처럼 마음을 나누는 노인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밝혔듯 헤밍웨이는 평생 외롭게 줄기차게 썼다. 홀로 앉아서 상남자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다 보니 남자 심리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구를 해 종은 울리나’ 이후 10년 간 글을 내지 못해 작가 인생이 끝난 취급을 받다가 ‘노인과 바다’로 퓰리쳐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삶과 꼭 닮았다. 인생과 싸우던 그는 노인과 비슷한 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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