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학 개론-어린 아들 굿에 간 어미 기다리듯
아들은 애니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 터닝메카드를 좋아해 작은 변신 자동차를 사모으다가 신비아파트로 옮겨가서 신비, 금비가 그려진 색칠공부,연필, 지우개, 피규어, 카드를 샀다. 특히 이가은을 좋아했다. 책상 위에 이가은 피규어를 놓고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이쁘다..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정상인가? 허술하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인형상을 보고 저러다니 혹시.. 내 아들이 오타쿠? 순간 살벌한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 다음엔 겨우 귀멸의 칼날로 관심이 넘어갔다가 이젠 주술회전이다. 나는 칼로 베고 싸우는 장면이 무섭고 피를 싫어하는데 아들은 그게 아무렇지 않은가보다.
올 것이 왔다. 아들의 관심은 야한 일본 애니로 진화했다. 핸드폰으로 몰래 보는 걸 발견하곤 기겁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왜 가슴이 풍선같은 여자 나오는 만화를 자꾸 봐? 너 그런 게 하고 싶은 거야?
-엄마는 신비아파트 본다고 신비아파트에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런 애니를 본다고 그런 걸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뻔한 야한 영상에 의한 부작용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제대로된 지도가 안된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사춘기 성적 호기심으로 저렇게 왕가슴 여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애니를 보는 게 보통인가?
김부장은 또 뭐야.
인터넷에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애니들이 너무 많고 접근도 쉬운데 그걸 금지시키는 것이 맞는건지, 가능은 한지 모르겠다. 철저히 규제해서 부작용이 생기고 나를 꼰대 취급하고 벽을 치게 되는 건 아닌지하는 걱정도 앞선다. 꼰대라는 말은 어른의 근간을 흔들고 모든 통제를 뒷걸음치게 하는 위력이 있다. 꺼져라, 뿅. 잔소리를 퇴마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엄마, 나 주술회전 26권은 꼭 사고 싶어. 다른 권은 괜찮은데 26권은 꼭 봐야 돼. 6000원 모았어.
아들은 일요일에도 국어, 농구를 배우러 가서 시간이 별로 없다.
-네가 정말 원하는 거면 아빠가 도와줄게. 서점 가자.
남편이 원래 좋은 아빠였던듯 선심을 쓰며 끼어들었다.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 다시 주술회전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째 눈만 마주치면 주술회전이다.
-아빠한테 물어봐.
아들은 내키지 않지만 처음으로 회사에 있는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아빠, 나 오늘 서점 좀 데려다주면 안 돼요?
어젯밤 자기가 뱉은 말을 까맣게 잊은 남편은 갑작스런 아들의 전화에 놀랜 눈치다.
-오늘 학원 끝나면 8시요. 네, 그때 갈 수 있어요.
아빠한테 눈을 네모나게 뜨고 까칠하게 대들던 녀석은 퇴근한 아빠를 보고 급격하게 반가워한다. 둘은 10년 만에 만난 죽마고우 마냥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고 떠들며 서점으로 나섰다.
떠날 때와 다르게 아들은 굳은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가위를 찾아 만화책 비닐을 뜯을 참이다. 신줏단지 모시듯 경건하고 신중하다. 책표지가 접히지 않게 살짝 들춰 만화책을 폈다. 만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파로 가서 비스듬히 눕는다. 심각하게 눈썹을 모았다가 흐흐흐하고 소리를 내다가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표정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 날씨마냥 변화무쌍, 가관이다.
-저렇게도 재미있을까.
-우리도 저랬잖아.
남편은 중학교 때 샀던 ‘라즈리의 대모험’이라는 만화책을 지금도 갖고 있다. 인생의 명작이란다.
-차라리 날 갖다 버려. 이건 절대 안돼.
남편은 비장했다. 큰칼만 옆에 안 찼지 이순신의 기개다. 이사를 네 번 하는 동안에도 묵은내 나고 좀벌레가 득실한 만화책 상자를 가장 먼저 챙겼다. 나는 손닿기가 두려워 그 역작을 차마 읽지 못했다.
나에겐 만화책보다 카세트테이프였다. 사고 싶어서 레코드점 앞에 수없이 서성거리고 용돈이 생기면 달려가 샀다. 마음껏 살 수 없어서 카세트테이프들은 더 소중하고 귀했다. 용돈은 늘 부족했고 베스트 중에 베스트를 추리고 추려 샀다. 친구와 교환해서 듣거나 친구에게 신곡을 소개해주고 테이프를 빌려줬다. 더블데크 카세트 플레이어가 나오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선물하는게 유행이 되었다. 이승환, 신해철, 015B, 조지 마이클, NKOTB.. 취향이 비슷한 친구를 만나면 영혼의 단짝을 만난냥 기뻤다.
내가 혼자일 때 옆에 누군가 있는 듯 느끼게 해 주고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가 있어, 그게 바로 너야. 근거 없는 자신감을 수없이 귀에 외쳐 준 것도 카세트테이프였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되감아 듣다 보면 어느덧 가사와 혼연일체가 되어 진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느덧 시디의 시대가 밝아오고, mp3로 급하게 대체되면서 음원을 구하고 복제하는 것은 쉬워졌다.
거리를 쿵짝거리고 시끌벅적하게하던 전국의 레코드점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원래 한번도 세상에 없던 것처럼 흔적이 없다. 시원하게 여름비가 내리면 시내 레코드점 앞에 하염없이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듣던 날이 떠오른다. 가게 밖으로 나와있는 커다란 두 개의 스피커는 집에 있는 미니카세트와 비교가 안되게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오디오시스템이나 전파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왜 같은 노래인데 전혀 다른 소리와 울림을 만드는지 신비롭기만 했다.
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kind of….
보도블럭이 뚫어질 듯 거칠게 내리꽂는 굵은 빗줄기를 타고, 내 뒷골로 흘러들어온 Richard Sanderson의 목소리는 전기충격을 맞은 듯 찌릿했다. 사람들은 장대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텅 빈 거리에는 Reality와 나만 남아있었다. 쏴아하고 쏟아지는 빗소리와 Sanderson의 부드러운 미성은 내 몸을 휘감아 붕 띄우고 소피 마르소가 사랑의 첫만남을 위해 달려가던 파리의 어느 골목에 데려다 놓았다. 영화의 장면들이 슬라이드 필름으로 눈 앞에 짤깍짤깍 흘러갔다.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날을 꼭 기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찌릿한 감동은 이제 다시 만들 수 없다. 뱅앤울롭슨 고조 할아버지가 와도.
https://youtu.be/T5dnEKqOaHw?si=e8jbx-lmoXrmOBSm
하고 싶은 것이 금지되고 미뤄진 학창 시절이기에 느끼는 재미를 아들도 느끼고 있을까. 시험기간만 되면 꿀잼이던 책들, 보고 싶던 영화, 듣고 싶은 노래들. 시험기간이 끝나면 더 재미있는 것들의 홍수에 밀려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마법을 부렸다. 결핍으로 인해 더 안달나고 달달한 감각의 시기를 아들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아들은 쉼없이 추억 생산 중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에게
그립고 그리운,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