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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Aug 06. 2024

황병기와 딜런 클리볼드, 그가 기다린 한 사람

아들학 개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이화여대 황병기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서울에 대학을 붙었다고 열린 동네잔치의 열기가 식기도 전이었다.

“… 못 해요, 저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꼬질한 고학생의 모습을 하고 이화여대 음악대학 교수실의 문을 두드리는 상상만으로 땀이 났다. 뭘 바라고 온 듯 무슨 망신일 것이고 얼마나 뻘쭘한 악몽일까.

아버지는 황병기 교수가 우리 먼 친척이고 그분이 우리 큰아버지를 애타게, 평생 찾고 있다고 하셨다.


“그 가야금으로 유명한 황병기 교수? 그분이 왜?”


황병기 교수는 어렸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어머님이 우리와 꽤 가까운 친척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를 맞은 황병기는 잘하던 공부를 놓고 방황했다. 그때 아버지의 형인 김소열 씨를 만났다. 큰아버지는 서울대 학생으로 동네에서 머리 좋기로 유명했다.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 큰아버지는 개구쟁이 황병기한테 공부는 안 가르치고 같이 가재 잡고 물장난 치고 놀기만 했다. 참 희한한 선생님이다 싶었다. 그러면서 주변 자연에 대한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말로 가르쳐주고 사물에 호기심을 품게 했다. 이야기에 홀딱 빠져든 황병기는 공부에 호기심을 느끼고 큰아버지를 따라 책을 보고 공부하게 되었다. 밀당의 고수로 매일 감질나게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가야금과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큰아버지와 함께 ‘춘향전’을 보고 “너는 어려서 아직 모른다.”라는 말에 자극받아 시작하게 되었으니 인생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었던 듯하다. 황병기 교수는 평생 이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난 그 아저씨가 미리 이 길을 닦아놓은 거라고 봐요. 내 평생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 같아. 완전히 지남침(指南針)이 거꾸로 돌아버렸으니까요.
-황병기


아버지는 신문기사와 티브이 토크쇼 등에 황병기 교수가 출연해 여러번 그분을 찾고 싶다고 했으니 내가 김소열 씨의 조카라고 찾아가면 분명 반가워할 것이라는 거였다. 나는 끝내 찾아가지 못했다. 황병기 교수의 부고는 신문에서 보았다. 나의 큰아버지는 6.25 전쟁 중 납북인지 월북인지 북으로 가시고 그 후 소식이 끊겼다. 형이 월북한 빨갱이 집안이라고 몰려 아버지도 불려 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34명의 사상자를 낸 1999년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가 쓴 책이다. 범행 전날까지도 아버지와 진학할 대학의 기숙사 방에 들어갈 가구 크기를 상의했던 딜런이 왜 끔찍한 사건을 오랫동안 계획했고 학교를 날려버릴 만한 양의 폭탄을 자기 방 침대 밑에 깔아 두었는지 딜런의 엄마는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미용실에서 학교 총기난사 사건 소식을 들었다. 딜런의 부모는 주말이면 아들과 캐치볼을 하고 대화가 많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딜런은 학교 운동부를 위시로 한 친구들에게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고 오랫동안 자존감 하락과 우울 증세를 겪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속마음이나 우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남자아이들의 마음의 상처에 관심을 갖자고 애끓는 사죄와 반성의 글을 썼다.




“나는 세상에 대한 연쇄 테러를 시작하려 한다. 이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거기에 있는 모든 놈들을 없애버리자.”

또 다른 미수에 그친 교내 공격사건의 주동 남자아이의 말이다.


“청소년기의 남자아이들, 사랑받지 못한 외로운 남자아이들이 탐색의 길에 오르지 못하고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친구들이나 사회적 그룹에서 거부당할 때 자신의 정체성 전부가 파괴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재 청소년기 남자아이의 사회적 거부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연구에서는 이런 아이들에게 일대일 멘토링위기 개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계속 밝혀내고 있다. 영향력 있고, 교육에 열의가 있고, 이해심 깊은 한 명 이상의 어른이 남자아이가 건강한 탐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남자아이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입지를 넓히고, 자아를 발달시킬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형이나 다른 남자 어른들을 포함하여 자신을 직장, 가정, 사회 그룹 안의 새로운 인간관계로 데려가줄 사람에 목말라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사회와 가족과 공동체의 의미 있는 일원이고, 거부의 고통 속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소년의 심리학, 마이클 거리언>



아들 반의 회장아이는 정확하고 깔끔하며 수, 과학을 잘한다. 재능 있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특목고에 보내려고 우아한 그 엄마도 노력 중이다. 선생님이 없는 곳에서만 그 아이는 반에서 가장 약한 아이를 놀리거나 괴롭히고 더 고립시킨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선생님의 뒤통수에 손가락 욕을 날린다. 영특한 그 소년도 옳고 그름을 가르쳐 줄, 의미 있는 한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 수 있을까.


딜런 클리볼드에게 저 한 사람이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일기장을 보면 사건 전날 밤까지도 딜런은 자살을 고민했다. 해리스와 달리 심약하고 우울했던 딜런은 그냥 혼자 죽고 말까 학교를 날리고 죽을까 끝까지 망설였던 것이다. 운명이 갈리는 고민의 밤, 딜런이 달려가 상의할, 믿고 따를 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를 이해해 주고 이야기를 받아주고 새로운 인간관계로 넓혀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공학도 지망생 딜런은 황병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13명의 어린 사망자들과 21명의 부상자들도 자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딜런에게는 같이 괴롭힘을 당하는 나르시스트 친구 해리스 뿐이었다.


황병기 교수는 어린 시절 잠시 만났던 가정교사 대학생을 왜 늙도록 찾았을까. 소년 황병기가 그에게 느꼈던 말하기 어려운 이해와 감동을 평생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과 탐색, 배움과 성장을 이끌어줬던 한 사람. 공부하라고 모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의 재미를 찾아 준 사람. 나와 시간을 보내고 놀면서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해 주고 내 삶의 목적을 보여준 친척 아저씨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그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아들에게도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스승은 죽은 지 오래된 세상이다. 스승은 꼰대소리에 상처받고 아동학대 소송에 죽었고 자본주의에 죽었다. 스승은 돈이 안된다. 예전에는 길에서 엄마 말 안듣고 떼부리는 아이가 있으면 누군가는 나서서 '예끼놈, 엄마말 들어야지!' 하고 엄마와 나 사이에 껴드는 어른이 꼭 있었다. 그분은 옆집 할머니이기도 지나가는 아저씨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 사이의 유대는 끊어졌고 우리 가족만 돈 많이 벌어 편안하게 누리고 살면 다른 것은 뭐든 상관없다. 누구도 다른 집 아이에게 영향력을 미치는데 생명과 돈을 걸지 않는다. 대한민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지만 부모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식에 비용이 많이 들고 자식 걱정에 목이 조인다. 이재용만큼 줄 수 없을 바에야 이 고민의 크기는 누구도 다르지 않다. 부모들은 자식만 바라보고 산다. 아들은 누구를 보고, 누구와 이야기하고 자랄 수 있을까.  


매일 얼굴 보는 부모는 절대 알 수 없는 소년의 내밀한 고민, 상처, 꿈, 탐색을 함께 이끌어 줄 그 형, 한 사람. 내 아들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의 큰아버지는 부리부리하고 훤칠한 모습의 사진만 남기고 20대에 사라지셨지만 소년 황병기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어른으로 남았으니 사람의 쓰임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낙제생과 외당숙>     

                        - 황병기(오동 천년, 탄금 60년 중에서)


어린 시절에 나는 쓴 약을 먹는 것보다 공부하기가 더 싫었다. 입학 전까지 나에 대한 집안 어른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아들이 귀한 황씨 가문의 삼대독자로 태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실제로 학교에서는 '기역, 니은......'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그동안 국어를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4학년 마지막 학기부터 우등생이 됐다. 낙제생 황병기가 우등생이 되고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게 된 데는 우리 집에서 묵었던 한 친척 아저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저씨의 이름은 김소열. 외당숙이었다. 아저씨는 광복 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지방에서 나이 많은 학생들이 서울대로 오는 게 유행이었다. 부모님은 하숙비 대신 나의 가정교사 역할을 주문했던 모양이다.

아저씨와 나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아저씨가 아랫목에 눕고 나는 아저씨 배 위에 올라앉아 삼국지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쉽도록 재밌게 각색한 삼국지였다.

종이 위에 연필로 한 획을 긋는 일조차 입안의 쓰디쓴 약으로 여기던 내가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그분의 남다른 '하루 공부법' 덕분이었다. 그날의 공부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 내가 "더하자"고 조르면 오히려 그는 "그만하자"고 잘랐다. 그의 작전이었다.

국악을 시작하게 된 데에도 아저씨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어느 날 국도극장에서 '춘향전'을 함께 봤다. 처음 보는 창극이 지루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 네가 이 맛을 알려면 한참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아저씨가 말한 그 '맛'을 반드시 일찍 찾아보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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