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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Aug 13. 2024

아들의 담임운, 호밀밭 그 파수꾼

아들학 개론- 꽃이 먼저 피고 열매는 나중 맺는다.

6년간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모두 나와 같은 여자였고 차분하고 꼼꼼하고 친절했다.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만난 첫 담임선생님이다. 이미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치며 아들이 아주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가 두려웠다. 친한 선배 엄마는 그런 것을 미리 선생님께 알리지는 말라고 했다.


1학년 담임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아들은 운이 좋았다. 엄마들은 모두 그 반에 가고 싶어 했으니까. 매일 하굣길 교문에서 본 선생님은 서른 후반 정도의 나이에 날씬하게 잘 어울리는 감색 원피스나 유행에 맞는 디테일이 있는 하얀 블라우스를 즐겨 입으셨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머리가 차분했다. 갸름한 얼굴엔 미소를 머금었지만 잘못한 아이들은 따끔하게 바로 잡아 학급을 잘 운영하시며 교실이 언제나 정돈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1학년을 여러 번 맡아보셨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과 꼭 알아야 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았다. 

그 모든 좋은 것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선생님의 기준에 너무도 못 미치는 아이였다. 선생님의 체스판처럼 깔끔하고 잘 짜인 수업에서 아들은 잘 따라오지 못하는 쪽이었다. 노트와 연필을 꺼내고 수업의 준비를 갖추는 것부터 거칠고 끼익 거리는 마찰음을 냈다. 두 번째 상담에서 선생님은 벼르고 별러 참았던 이야기를 쏟아 내셨다. 


“윤이가 마음은 순수하고 착한 친구예요. 그런데 기본 생활 습관이 안되어 있고 아이들과 상호작용이 원활하지 않아요. 수업시간에 전혀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고 먼 산을 보거나 옆 친구를 방해하기도 해요.”


나는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하고 집에서 더 열심히 가르쳐보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들의 발달 수준은 그 정도가 맞았다. 선생님의 말에는 현재의 아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렇지만 사랑의 매가 덜 아픈 건 아니다.


2학년 선생님은 좀 더 나이가 많고 편안한 스타일이셨다. 아들을 둘 기르고 있는 분이라 이해도가 높았고 아들도 조금 컸다. 아들은 간간히 교실 다툼에 일조를 하고 선생님은 때때로 전화를 주셨다. 그러다가 그 반에는 친구의 발을 걸어 어떤 아이의 앞니가 깨지는 대 사건이 일어났다. 혹시..? 했으나 다행히 다른 아들이었다. 남일 같지 않았다. 가해자 아들 엄마와 피해자 아들 엄마는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싸움을 벌였다. 선생님에겐 그동안의 우리 아들의 사건과 문제들은 잊어버릴 만큼 충격이 컸다. 전화가 멈췄다. 몇 달 만에 본 선생님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피해자 엄마는 화를 많이 내고 보상을 요구하고 받은 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윤이 3학년 3반이라며? 어떡해….”

아들 반의 선생님이 좀 특이하다고 했다. 그 반은 작년에 수학 익힘을 하나도 풀지 않았고 사회만 일주일에 7시간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좋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반을 운영하고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고 뛰어다녀도 내버려 두어 교실은 난장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 속에서 아들은 괜찮을지 걱정이 앞섰다. 벌써 3학년인데 공부는 따라갈 수 있을까?

공개수업에서 본 교실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시판에 그림은 삐뚤빼뚤 걸려있어 심난스러웠다. 교실 곳곳에  주인 손이 닿지 못한 쓰레기가 있었다. 제일 시급해 보이는 건 선생님 책상 주변에 가득히 쌓인 책더미와 서류 뭉치였다. 저 틈에서 뭔가를 계획하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첫 상담을 갔다. 선생님은 아들이 잘하고 있다고 하셨다. 총명하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어리둥절했지만 눈물 나게 고마웠다. 사회성 부족하고 좌충우돌할게 뻔한 아들의 학교생활에서 좋은 점을 애써 찾아주심에 그저 머리가 숙여졌다.

 혼란스러운 교실에서 1년을 사고 없이 무사히 지냈다. 학년이 올라가며 나는 담임선생님에 대해 점차 촉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아들은 계속 다채롭게 사고를 쳤다. 몸으로 투닥거림은 줄었지만 여자아이를 놀려서 울리기도 하고 패드립을 쳤다고 했다. 분노조절장애 아동이 혼나고 있는데 아들은 쯧쯔 하고 혀를 차서 그 아이가 줄줄 울면서 죽여버리겠다고 쫓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사회를 배웠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첫 장에는 맹랑하게도 ‘어머님께 드립니다.’라고 써있다. 작가는 이 모든 엉망진창과 우발적인 거짓말과 욕설, 미치광이의 이야기를 어머님께 드리고 싶단다. 작가의 이 자전적 소설에서 어머니는 예민하고 섬세해서 충격을 받으면 안 될 인물이다. 어머니는 동생 피비에게 가장 세련된 옷을 골라주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홀든은 4번이나 퇴학당한 자신이 한심하지만 엄마를 실망시키기 싫어 퇴학을 감춘다. 실망시킴은 곧 분리와 독립이다. 뭘 해도 안 되는 녀석임을 깨닫고서야 부모는 아들을 놓아준다. 홀든은 아직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분리될 준비가 안된 어린애인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런 방황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내 혼란과 못난 모습을 들키기 싫어하는 마음 반이 뒤엉켜 싸운다. 책은 홀든의 마음속 소요를 따라가며 적는다. 


 소설의 배경은 온통 매서운 추위다. 홀든의 고독한 마음 속 같다. 햇빛이 작열하는 여름이라면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탕탕 큰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갔을텐데. 겨울은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파고들어 웅크리고 결국 니 탓이잖아하고 나를 공격할 뿐이다. 겨울이 결국 지나갈 한 단계라지만 쫓겨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한 홀든은 살을 에이는 추위 속 길 위에 서 있다. 키는 멀뚱히 크고 행동은 아이처럼 어설픈데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입에서는 욕과 절망의 소리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것만이 진심은 아니다. 홀든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이리저리 쏘다닌다. 비효율적이고 환영받지 못하는 방문의 연속이다. 비싼 택시비를 버리고 기껏 찾아간 곳에서 다투거나 내쫓기거나 도망친다. 


홀든은 어떤 기대로 두 명의 선생님을 찾아갔다. 홀든에게 두 선생님은 각자 다른 색깔로 위선자다.


스펜서 선생님은 학교를 뛰쳐나와 무작정 찾아간 사람이다.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홀든은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홀든의 말은 거의 반대로 이해하면 맞다.) 관심은 기대다. 가출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집을 나와 처음으로 찾아간 데는 이유가 있는거다. 궁지에 몰렸을 때 생각나고 위로를 기대하고 그래도 이 사람은..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늙고 추레한 외모로 실망을 안겨준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는 홀든에게 역사 시험지를 보여주며 틀린 문제를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무 소용없는 지식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선생님. 낙제를 줄 수밖에 없었음을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하느라 바쁘다. 선생님은 마음이 약하고 겁도 많다. 마음의 가책도 악역도 싫다. 역설적이게 선생님은 홀든의 장래를 걱정한다. 홀든이 기대한 건 이런게 아니었다.


선생님,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정말입니다. 저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저는 지금 하나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 아닙니까?  

홀든은 선생님께 듣고 싶었던 말을 자신이 해버린다.  


Nirvana- Feels like a teen spirit



안톨리니 선생님은 더 최악이다. 홀든은 그를 ‘내가 만난 선생 중에 가장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농담을 주고받아도 이쪽에서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장 홀든을 아끼고 위하는 척, 술에 취해 떠들어대다가 홀든이 잠든 사이 성추행 비슷한 상황을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호자 없는 청소년은 만만하게 성착취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홀든은 화들짝 옷을 챙겨 부들거리며 도망간다. 

홀든이 만난 선생들은 하필 이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이야. 몇 천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피비를 만난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을 잡아 주고 싶다고 말한다. 홀든은 그 파수꾼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자신을 넓은 호밀밭에서 방황하고 탐색하게 하고 그 방황의 끝(자신도 그 끝에 있는 낭떠러지가 두려운)을 규정지어 주고 “이제 됐어, 여기까지니까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해 줄 파수꾼을 만나고 싶었다. 48시간 동안 자신을 잡아줄 파수꾼을 찾아 추운 거리를 헤맸지만 옛 여자친구도, 예전 선생님도 그런 존재가 되어주진 못해 홀든은 절망한다. 순수한 동생 피비를 보고 이 아이들도 자라면 나처럼 방황하고 ‘누구나처럼’ 길 잃을 때가 될 텐데 내가 그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춘기 소년의 말은 반대로 들어야 맞다. ‘꺼져’하면 ‘날 버리지 마.’ ‘엄마 미워.’ 하면 ‘엄마, 나 좀 봐줘.’ 일 때가 그렇다. 


그런 면에서 피비는 옳았다. 따라오지 말라는 홀든을 끝까지 쫓아가서 그를 지켰다. 피비는 호밀밭에서 헤매는 홀든을 붙잡아주는 파수꾼이다. 많이 배운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것을 꼬마 피비가 해주었다. 그녀는 진심이 있다. 피비는 홀든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내적 자아의 목소리인지 모른다. 답은 내 안에 있는 거니까.


“아빠가 오빠를 죽일거야.” 


“앨리 오빠는 죽었어. 오빤 늘 그 말만 해. 그건 실제가 아니야.”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


어리지만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그녀가 자신의 전재산까지 쥐어주자 못난 오빠는 처음으로 한참을 엉엉 울어 버린다. 터진 눈물은 그간의 모든 외로움과 방랑, 추위의 해소다. 해결된게 아무 것도 없어도 마음이 치유되다면 희망은 있다. 결국 피비 덕분에 홀든의 서부행은 좌절되고 홀든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그놈의 모리스 녀석도 그립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아들과 선생님, 파수꾼.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도 의미 없는 발걸음은 없었다. 방황은 방황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흙바닥에 등 대고 누워있던 시간은 그대로 내 인생엔 꼭 맞는 퍼즐이었다. 


다양한 선생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나와 꼭 맞는 사람, 나를 깎아서 만들어주는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넓은 바닷가 어느 구석에서 돌은 세찬 파도에 깎이고 잔물결에 쓸리면서 제 모양을 찾아간다. 자기가 세상에 나온 목적을 찾아가고 아들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다. 




이 모든 방황에도 네가 돌아갈 집, 엄마는 너를 생각한다. 생각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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