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won Aug 20. 2024

만약 우리의 언어가 연필이라고 한다면

아들학 개론- 한번 검으면 흴 줄 모른다.

아들은 책상에 앉아 연필부터 씹는다.


“너 연필 또 씹을 거야?”

“안 씹었어요.”

말하는 입에 연필의 칠 가루가 듬성듬성 반짝인다.

저 연필 도료가 입에 들어가 좋을 게 없을 텐데. 아들의 잦은 잔병치레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크레용 대신 연필을 쥔 때부터 아들은 연필을 씹었다. 오독오독 맛나게 연필 끝을 다 물고 나면 몸통까지 아작아작 씹는다. 연필은 견디지 못하고 ‘날 차라리..’ 말하는 듯싶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요.”


말은 제법 의젓하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가슴이 쿵쾅거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11살 때는 ‘이러다 나 백수 되는 거 아닐까 해서 무서워요.’라고 해서 엄마를 먹먹하게 했다. 치열한 사회에 떨궈 놓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어린이 입네 하고 유치원, 이젠 학생이다 하고 초등학교, 중학교로 등을 밀어오진 않았는지. 아들은 천천히 크는 아이였다.




 민족의 기쁨, 광복절에도 학원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순하게 보충수업 길에 올랐다. 이른 점심밥을 챙겨 먹고 버스를 갈아타는 먼 길을 가야 한다.


-빠진 책 없지?


저번에도 부교재나 숙제노트를 두고 와서 선생님께 혼났다 하여 여러 번 다짐받았다.


-네, 없어요. 이것만 가져가면 돼요.


크록스를 꿰어 신고 등짝에 봇짐 같은 배낭을 메고 현관문을 시원하게 박차고 나간다.


아들이 나가니 한 김이 빠진 듯 집이 서늘해졌다. 남편과 딸이 있어도 공기에 여유로운 정적이 흘렀다.


30분쯤 지나 샤워하는데 문자가 빗발친다.


-엄마, 나 필통을 두고 와서 뭘 풀 수가 없어. 연필 좀 갖다 주면 안 돼? 한 번만.”


도대체 필통 따위를 갖다 주려고 대기나 타고 있는 호락호락한 엄마가 아니다. 패기를 보여주자.


-선생님께 빌려. 옆 친구한테 빌리던가.


-형들 밖에 없어. 선생님이 형들 가르치는데 화난 거 같아서 말 못 하겠어.


-엄마는 못 가. 네가 알아서 해결해. 아래층 사무실에 가보던가.


-그게, 어디 있는데..


30분 넘게 팽팽한 대화가 이어진다. 그 시간 동안 공부엔 진입도 못 하고 연필 없다고 문자질만 하고 있다니. 오 마이 프레셔스(머니).. 엄마는 투전판 노름꾼처럼 본전 생각이 난다. 잠시 후 겨우 연필 1개를 획득했다고  한다. 이게 기쁠 일이냐 싶지만 속없이 기쁘다. 긴 줄다리기를 끝내고 엉덩이에 먼지 털고 옷을 추스르나 싶은데 10분 있다가 느닷없이 휴대폰이 번뜩인다.


-연필이 부러졌어. 엄마 한 번만 와줘.


혈압이 확 솟는다. 험한 말은 내 교양을 위해 가볍게 삼켜준다. 2차 버티기.


-어렵겠어. 혹시 앞주머니에 비상 연필 없어? 저번에 넣어놨는데. 차라리 편의점 나가서 사와.


-무슨 편의점? 비상연필 없어.


밀고 당기는 실랑이는 후반전이 열렸다.(이쯤 되면 계속 댓구하는 나도 강한 려성되기는 진즉에 틀려먹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조용해진다. 그래, 아들씨. 당신도 연필에서 인생을 배우세요. 포기를 배우고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을 누르고 어쩔 수 없이 부탁하는 법도 배우시구려. 다시는 이런 수모를 겪지 말자 챙김의 미덕도 챙기고. 엄마는 언제까지 네 뒤를 쫓아 다니지 않는 매정하고 게으른 인간인 것도 기억해 주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넣어주었던 연필이 떠오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담임선생님이 주문한 문구류를 고심해서 샀다. 연필 깎기에 연필을 집어넣어 돌돌 손잡이를 돌려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두었던 연필. 알록달록 길쭉 날씬한 연필을 보며 7년 전 태어난 내 아이가 학교에 가서 이것을 작은 손에 쥐고 공책엔 뭔가를 쓰겠구나하고 가슴이 저릿하던 때로 생각은 날아간다.


아들이 글씨 쓰는 모습은 안간힘이다. 고개는 바짝 숙어지고 눈은 심각하게 찡그려 종이 위를 보며 손은 연필을 꾹 눌러 쥐고 적어간다. 연필을 쥐는 손은 이상하다. 넷째 손가락에 연필을 걸쳐 잡아 힘을 줘 엉뚱한 곳에 옹이가 박혔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김훈


한겨레에 실린 김훈 작가의 손

김훈 작가에게 연필은 그의 삽이다. 디지털 기기와 가깝지 않지만 배울 의지도 없는 이 땅의 아버지다. 노인들도 스마트폰과 태블릿, 유튜브를 헤엄치며 80년 넘게 산 인생에 새롭게 더할 생존의 기술을 익히지만 김훈 작가는 흔들림이 없이 연필로 글쓰기로 밥벌이에 매진한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겠다 싶게 드물고 귀하다.


나는 컴퓨터로 글쓰기를 하고 종이에 쓰지 못한다. 그날의 내 상태에 따라 희로애락이 그대로 드러난 글씨의 행태가 나를 처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와 마주하고 내보일 용기가 없는지 모른다.

 이젠 하얀 종이를 보면 뭐부터 시작해야할지 망망대해를 만난듯 하다. 자판 위에 얹힌 손은 습관적으로 뭔가를 눌러서 이야기를 꾸려내지만 종이는 내 머리마저 하얗게 물들이고 생각을 마비시킨다. 종이에 잘만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능력은 퇴화되었다. 인간의 꼬리뼈가 없어지다 못해 긴 좌식생활로 우리의 엉치뼈가 편평해질 지경이듯이.


아들이 종이에 뭔가를 꾸물거리며 쓱쓱 써가는 모습이 위대해지는 순간이다. 아직 굳어지지 않은 그의 손은 무척 미숙하지만 모든 것에 열려있는 순수와 가능성이다. 아들은 공책에 자신만의 무협 판타지 귀신 학교 공상 이야기를 즐겁게 쓴다. 그의 책상에 검은 지우개 가루가 수북하다. 땟국물 자욱한 공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동생이 한 번이라도 들췄다간 3차 대전이다.


나는 아들이 컴퓨터 자판이었으면 하는지 모른다. ㄱ을 치면 반듯한 ㄱ이 나오는 기계처럼 아들에게 들어간 입력값에서 기대한 만큼 나오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학원에서 선생님께 배운 것들이 머리에 착착 쌓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나는 웃을까? 아들은 행복할까?



아들은 연필이다. 오독오독 씹어먹은 시간의 이빨자국과 손의 땀, 침냄새가 흠뻑 배었다. 지우개 꼭지는 달아나고 패인 상처만 가득한데 칠은 반쯤 벗겨졌다. 그 흔적은 아들의 투쟁이다. 중학생 필수 영단어, 수학 c급 문제와 싸우고 폭풍같이 밀려오는 마음의 불안을 잠시 잠재우려고 짬을 내어 연필을 씹는다. 못한 숙제를 메꾸기 위해 오늘도 쉼 없이 연필을 구르고 쓰고 흔적을 남긴다. 불행히도 그 연필은 아들이 잠깐만 방심해도 또르르 굴러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다. 연필은 다시 책상 위로 기어올라와 감쪽같이 공책 위를 달린다. 지우개를 쥐고 힘차게 지워댄다. 중학생, 그는 실수해도 쓱쓱 지우고 고쳐쓸 자유가 있는 연필이니까.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나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하고        
 - 무라카미 하루키

또다른 연필 애호가, 무라카미 하루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연필이라면 아들은 울퉁불퉁 파이고 때 묻은, 축축한 연필을 내밀 것이다. 연필을 그러잡고 아들이 꿈꾸던 불안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공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주춤주춤 써 보일 것이다. 가끔 연필을 씹으며 꽉 쥐어 아픈 네 번째 손가락의 옹이를 주무르겠지. 아들은 말없이 말하고 그것으로 당신은 아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전 09화 아들의 담임운, 호밀밭 그 파수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