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들에서 소년으로
당신이 폭풍을 지나고 나올 때는 당신은 들어갈 때의 당신이 아니다.
그것이 폭풍의 전부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2024년 여름은 내가 지낸 여름들 중에 가장 잔잔하고 치열한 석 달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뒤적이고, 끄적이고 더 많이 지우면서 기록적인 더위의 여름이 훌쩍 지나갔다. 아침이면 알람 없이 눈이 떠져 도서관과 카페를 찾고 도서관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오픈런으로 들어가 땀이 식기도 전에 책을 폈다. 막상 도서관에선 글을 쓴 시간보다 책을 보거나 죽은 작가를 뒷조사한 시간이 대부분이라 쓴 글은 많지 않다. 열대야로 잠이 깬 새벽에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뒤척였다.
뭔가 쓰고 싶어 마음은 바쁜데 생각만큼 써지지 않아 안타까웠다. 쓰면서 찌르르하는 감동을 나는 느꼈지만 그 울림은 어딘가에 닿지 못하고 퍼져버린 듯 허망해서 의욕은 쉽게 작아졌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쓰는 것’이 필멸의 나약한 인간에겐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걸 이긴 작가라는 분은 다른 차원의 사람이구나 다시 생각했다.
처음 아들에 대한 글을 쓸 때 나는 아들을 키우며 생긴 고민을 다른 아들을 키우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멈추고 생각하고 쓰다 보니 나는 아들을 쓰기 전과 다르게 보게 되었다.
왜 저럴까? 샘솟는 물음표로 보았던 아들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 날 느낌표가 되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시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들여다보니” 아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진 것이다.
‘누구나 겪는 단계’를 지나는 중인 소년, 못나게 보이기 싫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소년, 나를 이끌어줄 어른스러운 형을 기다리는 소년들이 아들에게 보였다. 우리도 지나온 그 길을 열심히 걸으며 추억과 흑역사 사이를 오락가락, 뚝딱이는 소년이 있었다.
아들에서 소년으로.
윤이가 아들에서 소년으로 변했다. 이건 순전히 엄마 기준이다. 내 품 안의 아들에서 더 큰 세상 속으로 가는 소년이 된 것이다. 엄마가 좌지우지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키우는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사회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소년으로 나는 새로운 안경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밥을 벌고, 밥을 만들고 먹이느라 엄마는 아들을 자세히 보지도, 오래 보지도 못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콘후레이크와 삼각김밥을 먹이더라도 소년을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고 싶다.
열정의 한여름을 지나고 기다리던 찬바람에 흔들리며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초록잎 나무들이 보인다. 싱그러움을 한가득 쏟아내며 탄력 있게 흔들리는 나무가 참 좋다. 그 나무를 바라보며 함께 풍경을 완성하는 사람이 있어서 더 행복하다.
푸른 나무 같은 소년을 나도 오래, 자세히 보고 싶다.
나의 새로운 연장이자 친구 ‘쓰기’를 통해 내 시원찮은 시력을 조정해 줄 안경을 많이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