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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Aug 27. 2024

아들과 시인의 꿈

아들학 개론 - 오이 덩굴에서 가지 열리랴

‘원장선생님께, 꽃을 드리고 싶어요.’


유치원 때 아들은 스승의 날 감사 카드에 이렇게 썼다. 친구와 다투고 수업에 집중 못하고 헤차리가 많아 매일 선생님께 불려 가는 유치원 생활이었지만 아들의 카드는 은유 같기도 시 같기도 해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원장선생님은 ‘감사합니다.’ 일색의 카드들 가운데 아들의 카드가 인상적이라며 내게 보여주셨다.


그리기, 만들기, 줄넘기, 수학 어느 것도 특출 나게 잘하지 못 하지만 이 아이의 재능은 다른데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세 개 달린 사람들의 나라에선 두 개인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거니까.


등을 공처럼 구부리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책에 빠져드는 아들의 모습이 뿌듯하고 남몰래 자랑스러웠다. 그래, 너만의 청정한 파란 바다를 향해 헤엄쳐라. 바글바글 남들이 다 가는 그 길, 안 가도 된다.


속이 비칠 만큼 파란 너만의 바다, 넘실대는 물결과 수평선까지 펼쳐진 파란 바다. 그것은 시, 문학이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겠지.


그렇다고 아들이 일기, 독후감 등 학교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긴 글은 생각이 안 나서 이어나가지 못했다. 나는 약간 소심해졌다.


중학교에 가니 1학기는 자유학기제라 국어에서 아들은 시 수업을 받았다.


“엄마, 내가 시를 50개 써서 우리 반에서 제일 많이 썼다!”


아들이 마침내 자기 재능을 찾은 건가. 시를 보여달라고 하니 부끄러워서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한다. 작가의 주관과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므로 나는 조르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인내와 헌신, 그것이 작가의 어머니가 가져야 할 미덕이므로.


어느덧 학기말이 되었다. 녀석의 책가방은 언제나 구깃구깃한 종이 뭉치로 넘쳐나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방을 뒤집어 털었다.


-으응?

구겨지지 않은 빳빳한 색지들이 열서너 장 나왔다. 색지에는 반듯한 글씨로 쓴 아들의 시와 간단한 삽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우정, 인생, 반성 등 주제도 다양하게 시를 쓴 것이다. 나름 진지하기도 하고 중학생 특유의 시니컬함도 담아 생활의 고민, 생각을 담아 그럴듯하게 썼다.


보아라! 이것이 나의 아들이다. 시집을 만들어야 할까? 교과서에 실리고 어쩔 수 없이 외웠던 시들이 스쳐간다. 김소월, 한용운, 박목월, 조지훈..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의 감성을 내 아들은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작은 아이도 어느새 옆에 와서 오빠가 쓴 시들을 유심히 읽는다.


“엄마, 오빠가 시 썼어?”


“응,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썼대. 잘 썼지? 너도 한번 써봐.”


저녁을 먹고 나서 이 닦으러 가며 딸은 조잘댄다.


“오빠, 학교에서 시 썼더라? 어디서 많이 본 거던데? 그중에 친구에 대해 쓴 거는 누가 봐도 주술회전이랑 만화책 표절이던데, 맞지?”


“아니거든? 내가 쪼금 참고는 했지만 아예 표절이라니 그건 아니지. 근데 주술회전은 인정.”


“…”


에라이.


시어머니가 잘 쓰시던 이 실망의 감탄사는 어느덧 내 입에 착 붙었다.


넓게 펼쳐진 모래밭에서 바닷물의 습기를 촉촉이 머금은 모래를 만났다. 아들과 난 톡톡 두드리며 신나게 우리는 모래성을 쌓았다. 모래 속에 손을 넣어 무너지지 않게 단단히 성의 지붕을 고정한다. 성은 점점 완벽해져 간다. 그 순간 아들은 까르르 웃으며 모래성을 밟아 뭉갠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된다. 그 성은 원래 니 거였으니까. 너를 위한 꿈이었으니.


꿈꾸는 듯 소같이 맑은 눈, 비율에 안 맞게 점점 커지는 어색한 코, 교정으로 튀어나왔던 입술이 두툼해져 보기 좋은 입, 번질한데다 여드름이 산발적으로 올라오는 볼, 그 작은 아이가 커서 공부한다고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스스로 학원을 간다. 이건 싫다 저걸 하고 싶다 소리를 꽥 지른다.


아들 책상에 아기적 사진이 붙어있다. 그 앞을 지나며 볼 때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오묘한 생각을 일으킨다. 아무의 눈에도 크는 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어느새 쑥 커버린 창 밖의 여름 나무들. 그들은 추워 움츠렸던 겨울, 힘겹게 움 틔우던 봄은 까맣게 잊은 채 작열하는 태양을 즐기며 싸우고 있다. 초록빛 생생한 잎사귀에 부서지는 햇살은 밝게 터지는 소년의 굵어지고 걸걸한 웃음소리 같다.


똑똑한 척 어리숙하고, 아무 생각 없는 듯 의미 있는 한마디를 뱉는 아들.

아들은 어떤 남자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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