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맛비 열흘 만에 모든 길 끊어지고 성안에도 벽항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안에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 들려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닛거리 떨어지고 호박으로 죽을 쑤어 근근이 때웠는데 어린 호박 다 따고도 늦게 핀 꽃 지지 않아 호박 아직 안 맺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항아리 같아 살이 찐 옆집 마당 호박 보고 계집종이 남몰래 도둑질하다가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 "그 누가 네게 도둑질을 가르쳤나" 심하게 볼기 맞고 꾸중 듣는 중 아서라 죄 없는 아이 꾸짖지 말라 이 호박 나 먹을 테니 다시는 두말 말라 옆집 가서 떳떳하게 사실대로 말하라 어릉중자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셋길 열리리라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 만권 책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두 마지기 논만 있어도 계집종 죄 안 지을 것을"
다산 정약용이 호박으로 연명하던 시절에 쓴 '호박'이란 시이다. 다산의 감사론에는 배가 고파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가 도둑이 아니라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든 수령들과 감사들이 진짜 도둑이라 했다. 시에 나오는 '어릉중자'는 중국 산둥성에 있는 지명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만권의 독서가라면 지금에야 강연도 하고 하다못해 무슨 무슨 개발서라도 지어내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다산의 옹고집 같은 학문이 만든 주옥같은 저서가 화수분이 되어 생전에 아내 품에 안겨졌으면 좋으련만, 가슴 한구석 진하게 아내의 심정만 보듬었던 다산의 인간미가 전해져 뭉클하다. 그나저나 나는 두 마지기 땅도 없으니 어디 금광이나 물색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