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 등급'이라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몇 편의 리뷰를 접근하다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란 문장에서 고꾸라졌다. 부역과 변절 그리고 적폐--. 살아 남아 힘을 갖고 있는 자들의 판단인데 명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명을 저울질할 어떠한 논리도 인간에게는 없다. 판을 뒤집을 줄 몰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안전한 틀에 기어 들어가길 원하는 인간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순교자로 살지 않는다. 그냥 버티며 부끄러운 걸 피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