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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원 Jun 18. 2024

세로쓰기 성경의 추억.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할아버지처럼, 어린 시절의 나는 성경책 없이 교회에 다니는 아이였다.


일요일 아침, 교회에 가는 길은 늘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어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 성경책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른들은 저마다 성경책을 펼쳐 들고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성경책 없이 맨손으로 앉아 있자니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소외감이 느껴졌다.


어른들이 성경책을 넘기는 소리, 페이지를 찾는 손길, 밑줄을 긋는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성경책을 펼치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어떤 지혜가 담겨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샘솟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에게 성경책은 멀고도 가까운 존재였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께 성경책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어머니께서는 "아직 네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야. 조금 더 크면 사줄게"라며 달래셨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성경책 대신 그림 동화책을 펼쳐 들었다.


며칠 몸이 아파 병원에 있다가 퇴원해서 교회에 갔던 날, 목사님께서는 강대상 아래에서 저 검고 두툼한 성경책을 꺼내 나에게 선물해 주셨다. 마침내 얻게 된 생애 첫 성경책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성경이 개역한글에서 개역개정으로 바뀌고,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며 저 아름다운 세로쓰기 성경은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목사님께 선물받은 성경책도 어느샌가 없어졌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 문득 저 세로쓰기 성경책을 한 권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받은 성경책을 소중하게 보관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중의 기독교 서점, 온라인 서점, 대형서점 어디에도 이제는 저런 세로쓰기 성경은 없었다. 수요도 없고, 이미 인쇄가 멈춘 지 오래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잊었다. 그러다 하루는 볼일이 있어 동대문 근처에 갔는데, 성경책 생각이 나서 일을 마치고 청계천의 헌책방 거리로 갔다. 거기에는 기독교 서적만 취급하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두어 가게에서 별 소득 없이 나와 세 번째 가게에 들어갔을 때, 나의 말을 들은 주인은 창고로 가서 한참을 찾더니 저 성경책을 가지고 나왔다.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1973년도에 발행된 책입니다. 50년은 된 셈이죠. 하지만 안은 아주 깨끗합니다.”



받아보니 과연 그랬다. 주인의 말처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표지와 달리 책 속의 종이들은 마치 어제 인쇄된 것처럼 깨끗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소중히 간직되었던 책이었으리라.


“이건 저희 집으로 가져갈 게 아니라 박물관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책장을 넘기며 어린 시절, 목사님께 선물 받았던 성경책을 떠올렸다. 그때의 설렘과 기쁨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소중한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검은색 가죽 장정에 세로쓰기, 거기에 빨간색으로 도련 된 테두리까지 완벽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성경책을 품에 안고 걸었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가던 그때처럼 설레는 마음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조심스럽게 성경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첫 장을 펼쳤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익숙한 첫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잊고 지냈던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가 담겨 있는 성경책. 나는 이제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위로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세로쓰기 성경책. 기도 하고 묵상 할 땐 이 성경책을 보고 있다. 이제는 삶의 동반자이자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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