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투비 미디어 덕후
1편을 보신 분들이라면 의아할 것이다.
그래, 영문과 다니다가 애니메이션 배울 수도 있겠지. 근데 거길 왜?
답은 내가 흔히 말하는 덕후였기 때문이다. 오타쿠.
'오타쿠(일본어: オタク、おたく、お宅、ヲタク)는 특정 대상에 집착적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일본어로, 주로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팬들을 의미한다.' 라는 것이 위키백과가 정의한 오타쿠다. 나는 무려 4살 때부터 애니메이션 덕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미디어 덕후였지만.
어릴 때부터 가요 프로그램, 책, 드라마, 영화, 만화 할 것 없이 골고루 다 봤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제일 아끼던 책 <어린 왕자> 속지에도 그림이 있었던 걸 보면 5살 정도 때부터 그렸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항상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옆집이 인쇄소여서(우리 가족은 복사집이라 불렀다.) 공짜로 그림을 코팅해주시곤 했다. 사람을 그리고 옷을 그려서 코팅한 다음 가위로 오리고, 스케치북에 배경을 그려 옷 가게를 만든다. 그림 공책에 당시 유행하던 '아바타' 놀이나 간단한 플래시 게임 같은 걸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관심받기도 했다. 어릴 때 그림 그려 본 친구들은 알겠지만, 그 순간이 가장 기쁘다. 고학년 때는 만화도 그렸다. 장르는 당시 유행하던 공포물이었다. 친구와 같이 릴레이 만화도 한 번 했었는데 그 친구는 액션을 그리고 나는 순정 부분을 맡았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 이런 양을 그렸나 싶을 만큼 그때는 쉬지 않고 그림들을 그렸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만난 단짝에게 나는 엄청난 애니메이션을 소개받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명작으로 꼽는 <강철의 연금술사>였다. 그 전까지는 항상 더빙된 애니메이션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자막으로 된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때 처음 봤다. 그런데 진짜 너무 완벽한 거다. 그동안 많은 애니메이션을 봐왔지만 이런 액션 연출은 없었다. '찰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화였다. 이런 스토리도 없었다.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메시지들이 많았다. 악역들마저도 매력 있었다. 오프닝이랑 엔딩은 1기부터 4기까지 얼마나 또 좋은지. '이렇게 청각, 시각, 그리고 감동까지 다 사로잡을 수 있는 매체가 애니메이션이구나' 하는 걸 절절히 느꼈다.
중3 때에 이르러서는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진지하게 꿈에 대해 생각했을 때, 애니메이션 감독이란 직업이 떠오르더라. 음악, 그림, 책 읽는 것, 글 쓰는 것도 좋아하면 애니메이션 감독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친구 중에 애니메이터가 꿈인 애가 있어서 엄마는 우리 또래에서 그쪽 직업이 유행인 줄 알았다나. '애니메이션은 대학 가서도 배울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일단 공부하는 게 어때?'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상, 공부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입시에 대해서 아무 지식이 없기도 했고. 특히 미술 입시에 대해서는 더 했다. 그 후부터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 번 그리면 너무 그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아예 손도 안 댔다. 엄마는 뒤늦게 고3이 되어서야 얘가 그림을 해야 했나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셨지만, 당시 영어 과외해주시던 선생님이 뜯어말리셔서 무산됐다.
그래서 정말로 웃기게도 나는 엄마의 말처럼 대학교 2학년 때 애니메이션학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선언하게 됐다. 예언이 따로 없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고민해보라고 하셨고, 결국 나는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에 미술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