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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영 Jun 07. 2020

1년 동안 두 번 이직하고 깨달은 것

대학교 졸업 후 나는 한 중견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 직무로 입사했다. 신입 채용이 으레 그렇듯 대규모로 인원을 채용하고 적절한 인원을 각 팀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배치는 개인의 희망보다는 부서의 필요와 개인의 ‘운’, 그리고 자기소개서를 읽고 인사팀이 어렴풋이 느낀 ‘감’에 따라 이루어졌다. 나는 몹시 운이 좋았다. 내가 가고 싶던 브랜드 마케팅팀에서 상품을 개발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를 오래 한 편은 아니었지만, 선택받기를 갈망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인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데 마음이 한껏 들떴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를 X만큼 시장에서 키워야지,’ 하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기특하기도 한 포부를 일기장 한편에 쓰기도 했다.


그렇게 입사 시의 부푼 마음도 잠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직을 꿈꾸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존버’가 시작된 것이었다. 직무는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상품 기획에서 생산까지 프로세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처음 해보기에, 링 위에 벌거벗은 채로 나가 맞아가며 배웠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화장품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시장조사는 괴롭다기보단 영화관에 가는 것처럼 일상에 활력소가 되는 시간이었으며 나 나름대로 제품의 ‘로직’을 정리하는 일도, 디자이너와 레퍼런스 이미지를 가지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펼치는 일도 즐거웠다.


문제는 그 회사가 작은 정치판이라는 데 있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만연한 회사였다. 매출이 안 나오면 ‘왜 매출이 안 나왔을까’ 다 같이 고민하고 해결점을 찾기보다는 누구 잘못인지 먼저 찾으러 드는 회사였기에 메일의 기록은 전쟁터의 소중한 총알이 되었다. 작은 문제가 생겨도 일단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급급했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을 병신 만들기 일쑤였고 비합리적인 결정이 만연했다. 회사 밖에서 만났더라면 굳이 미워하지 않았을 사람들을 혐오했고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에 화장실 한켠에 들어가 운 것도 두세 번쯤 된다.


그렇지만 ‘존나 버텼다.’ 선배들이 늘 2년은 참아야 한다고, 적어도 2년은 참아야 사회에서 경력으로 인정해준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2년이 지나고 사람인에 이력서를 올려두니 정말 헤드헌터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회사가 나를 원하며 그 시기가 꼭 들어맞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다음 회사로부터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비교적 합리적인 결정에 따라 업무에 임하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이길 원했다. 제안 오는 회사들은 대부분 지금 회사와 유사한 영혼에 겉옷만 바꿔입은 듯한 모양새였고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들은 주니어급 채용이 없거나 나를 원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 푸르른 목초지를 꿈꾸고 있을 때 한 스타트업에서 메일이 왔다.


안녕하세요, 강주영 님. 사람인에 올려주신 이력서 보고 연락 드립니다. (…) 당사에 관심이 있으시면 아래 연락처로 회신해 주시면 이후 면접 일정에 대해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고, 산업군 또한 자동차 관련 IT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분야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내게 연락한 이유는 경영진이 생각하기에 알맹이를 까보면 다 똑같은 제품을 예쁘게 포장하고 반질반질하게 닦아 소비자의 욕망을 들쑤셔 판매하는 데 도가 튼 산업이 화장품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동차 관리 용품을 개발하려고 하고 있었고 화장품 산업에서 2년 반가량 화장품 상품 개발의 ‘맛’을 본 내가 자동차 관련 지식이 풍부한 다른 누군가보다 그 일에 적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헤드헌터를 통한 이직 제안은 많이 받았지만, 회사에서 직접적으로 연락이 온 적은 처음이기에 나는 그 제안에 대번 마음이 끌렸다. 스타트업이긴 하지만 직원 수가 50명 정도 되는, 시장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회사였고 대표님의 인터뷰를 몇 개 읽어보니 본인의 생각이 확고한 사람인 것 같았다. 보수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스타트업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자유로운 이미지’에 대한 환상도 면접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청바지, 운동화를 신지 말라는 ‘규칙’을 새롭게 만들며 가뜩이나 납득할 수 없는 의사결정들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나를 더욱 옥죄고 있었다.


나는 면접을 보기로 했다.




면접은 목요일 저녁 7시쯤 이루어졌다. 면접을 보러 간 곳의 인테리어는 재직 중이던 회사와 딴판이었다. 여러 층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회사와는 달리 한 층으로 탁 트여있는 커다란 공간을 모두가 공유하며 사용하고 있었고 집으로 따지면 거실 격인 로비 비슷한 공간엔 높고 커다란 테이블과 주방이 있었다. 택배 박스와 생수 더미 등이 쌓여 있어 어수선한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물건이 공간을 압도해 답답한 느낌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오락실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레이싱 게임기 두 대가 공간 한쪽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작은 회의실로 안내되었고 회사의 대표님과 COO와 대면했다.


면접은 질문을 받는 만큼 질문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면접관들은 몇 가지 나의 경력과 관련 지식을 물어본 후엔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게 없는지 역으로 질문하라고 했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지금 재직 중인 회사에선 경영진이 타사 제품을 들고 와 ‘이렇게 좀 만들어 보라고’ 하지만 그에 필요한 원부자재 비용과 리소스는 전혀 지원해주지 않아 힘들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보자 대표님의 대답은 확고했다. 높은 MOQ든, 브랜딩을 위한 값비싼 디자인 에이전시 비용이든 그것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면 당연히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좀 더 가벼운 질문도 던졌다.


“복장에 대한 제한이 있나요?”


대표님과 COO는 조금 어이없는 질문을 받은 듯 웃으며 답했다.

 

“다 벗고 오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스타트업에 입사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면 그 회사의 대표를 보라는 조언이 있다. 스타트업의 경우 규모가 작기 때문에 대표의 비전과 능력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결정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까? 2시간가량 질문을 받기도 하고, 하기도 하는 면접을 본 후 나는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대표님은 재직 중이던 회사의 팀장이나 경영진 그 누구보다도 브랜딩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었고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면접 바로 다음 날 COO가 메일로 채용에 대한 제안을 보내왔다. 하루 정도 더 고민해 보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내려 둔 상태였기에 나도 바로 이직 의사를 밝혔고, 그렇게 처음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이직 후 직접 경험한 스타트업은 내가 상상한 것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유동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바꿀 수 있었고 연차 사유를 묻지 않았으며 옷차림과 대화는 자유로웠고 업무는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산업군이었다. 작은 립스틱과 쿠션 팩트를 만지작거리고 고도로 정제된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던 사람이 갑자기 세차를 취미로 하는 30~50대 아저씨들의 취향을 조사하고 커다랗고 두툼한 세차 타올과 묵직한 엔진오일의 세계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좋은 상품을 개발하고 멋들어지게 브랜딩해 파는 상품 개발의 본질적인 업무를 할 수 있다면 산업군은 상관없어,’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회사였지만 내가 뒤늦게 깨달은 것은 ‘화장품 상품개발자’ 혹은 ‘화장품 마케터’라는 직업이 나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였다는 것이다. 나에게 화장품 산업은 아름다움을 향한 즐거운 몽상이었으며 애정의 대상이었고 내가 마음으로 이해하는 무엇이었으나 자동차 산업은 외계인들의 언어로 쓰인 지루하고 두꺼운 전공 서적이었다. 이직한 회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타트업의 문화나 작은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직접 모든 것을 콜드 콜(Cold-call)로 알아봐야 하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자동차와 자동차 관리 용품에 전혀 관심도, 애정도 없다는 데 있었다. 산업군이 회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다.


회사가 싫거나 힘든 것은 아니었기에 1~2년간 더 다닐 수야 있었겠지만, 결국 나는 화장품 산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년 반의 화장품 개발 경력에 1~2년간의 자동차 관리 용품 개발 경력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커리어 패스(Career Path)로 나를 받아줄 기업이 있을까.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이직한 지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처음 이직을 준비하던 때보다 훨씬 절박하게 두 번째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다.

 

두 번째 이직도 쉽지 않았다. 첫 이직 후 비공개로 닫아두었던 사람인 이력서를 다시 열어두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첫 질문은 대부분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또 이직하려고 하는지’로 시작했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답변했다. ‘다시 화장품 산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요.’ 다들 겉으로는 수긍했지만 내가 다른 산업으로 성급하게 발을 디뎠다는 것 자체에 의구심을 갖는 눈치였다.


서너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까진 이어지지 않던 중 2번의 면접 기회가 생겼다. 하나는 동종업계 친구가 소개해 준 화장품 상품개발자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외국계 화장품 프로덕트 매니저 자리였다. 내가 더 희망하는 건 전자였다.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개발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고 친구가 그만두는 자리를 메꾸는 것이기에 회사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의 조언을 얻을 수 있어 부담감이 덜했다.


후자인 외국계 화장품 기업은 악명이 높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업무 강도가 ‘빡세고,’ 잡플래닛과 블라인드 후기를 인용하자면 ‘미친년들의 소굴’이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었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커리어로만 봤을 땐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었다.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는 영속적인 커리어였기 때문에 첫 이직이라면 지원을 고사할 이유가 됐을 소문도 이제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는 위워크(WeWork) 사무실을 이용하고 있었고 면접은 작지만 예쁘게 꾸며진 공간에서 딱딱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너무 그 자리를 편하게 생각해서 그랬을까.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함께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으며 화장품을 정말 좋아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면접관에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거듭 주장만 했을 뿐 그 근거에 대해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면접을 본 이후로 후회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아, 이 질문엔 이렇게 얘기했어야 하는데.’ 회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적으로 패인은 내가 면접 준비를 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 외국계 화장품 기업의 면접이 있었다. 한 번 꼬꾸라지고 나자 정신이 바짝 들었던 나는 유튜브에서 온갖 이직 관련 영상을 보며 면접을 준비했다.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담당하게 될 브랜드에 대한 스터디를 모두 마치고 준비된 상태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예상치 못했거나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받아도 말을 흐리지 않고 오기와 절박함으로 대답했다. 당시 면접이 테니스 경기였다면 아마 나는 마리아 샤라포바 못지않은 괴성과 함께 면접관의 서브를 받아쳤을 것이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로써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지 딱 3개월 될 때 즈음, 나는 또 한 번의 이직을 했다. 결혼식을 2주도 남기지 않고서. 뒤돌아 생각해보면 무슨 정신으로 그 혼 빠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나 싶지만 그만큼 업에 대한 집착과 절실함이 가장 강했던 때였다.




‘미친년들의 소굴’이라던 회사는 생각보다 정상적이며 첫 회사 요주의 인물들이 입원 환자라면 지금 회사의 그들은 내원 환자 수준에 불과하다. (이래서 사람에겐 비교의 대상이 중요하다.) 물론, 지금 회사에도 100% 만족하진 않는다. 정신없던 적응 기간이 끝나고 입사 1주년을 앞둔 지금, 빵빵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절실함은 어느새 반복적인 업무에 푸시식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해졌으며 습관적으로 회사를 욕하고 있는 나를 보며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의 이직 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이제 더는 ‘다른 어떤 곳’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명대사이다. 누구나 회사에 다니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에겐 자아실현과 안정적인 봉급이 그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그러나 이를 온전히 만족하게 해 줄 회사는 없다. ‘내 회사’가 아닌 이상 내 비전대로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안정적인 봉급 또한 영원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원했던 푸르른 목초지는 옆 동네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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