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남매’라는 인터넷 밈(meme)이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우애 좋은 남매의 모습 대신, 현실의 남매는 서로 가감 없이 ‘막 대하며’ 애정 어린 경멸의 말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점에서 나온 우스갯소리다.
나에게도 7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우리도 인터넷상에서 묘사하는 ‘현실 남매’처럼 격 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이름 대신 ‘야’라고 부를 때가 더 많지만, ‘너 오빠랑 (혹은 동생이랑) 친해?’라고 물어봤을 때 기겁하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뭇 남매들과 다르게 우리는 몹시 친한 편이다. 그런 우리도 함께 살 때 다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대부분 음식 때문이었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오빠와 4년 남짓 자취 생활을 했다. 일찌감치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 오빠가 먼저 일산에 살고 있었고, 나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게 되며 17평 오피스텔에서 단둘이 사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개인 공간은 없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남편과 연애 중이었는데, 둘 다 학생 신분으로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매일 만나 붙어있었고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꼭 남편을 만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 학교 과제로 주말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오빠도 만화가 화실에서 문하생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여서 귀가 시간이 밤 10시로 늦었다. 우리는 하루의 운행을 마치고 차고지로 돌아가는 버스처럼 매일 밤에 만나 엄마 아빠가 보내준 에어 매트 위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상황은 내가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고 오빠가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며 바뀌었다.
학생은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고, 회사원은 돈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고 했던가. 취직 후 나에게 절대적인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오히려 많아졌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신사역에서 3호선 대화행 열차를 타 정발산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게, 내가 그날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집에 가면 컴퓨터 모니터 한 편에 페인터나 포토샵을 켜두고 넷플릭스를 보며 태블릿 펜슬을 끄적이는 오빠가 ‘왔냐,’ 하고 나를 맞아주었다.
저녁 식사는 늘 골칫거리였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외식을 하기에 저녁엔 단출하더라도 따뜻한 집밥이 그리웠다. 반면 오빠는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어야 하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였다. 게다가 오빠는 10년 넘게 자취를 하고 있었다. 문하생 생활을 한 몇 년간은 화실 식구들과 잘 챙겨 먹었을 테지만, 그 외에는 매 끼니를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야 했을 것이고 그런 오빠에게 집밥을 요리해 챙겨 먹는다는 건 지난한 일로 느껴질 터였다.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따로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밥을 밥솥에 안치고 냉장고에 충성심 높은 강아지처럼 자리 잡고 있는 반찬 몇 가지와 김을 꺼내 먹으면 됐을 것이고, 오빠는 제 나름대로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든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으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식구란 무엇인가. ‘같은 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오빠와 같이 밥상을 마주하고 티브이 앞에 앉아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각자의 감상을 반찬 삼아 먹는 저녁 식사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오빠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오빠의 건강이 염려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창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오빠 배 아래 쪽에 있던 작고 검은빛의 종기가 육종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종암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병명이었다. 오빠는 진단을 받은 그해 삼성서울병원에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수술과 치료가 잘 끝나 퇴원 후 3~4개월에 한 번씩 CT 검사만 받고 있었다. 육종암은 원인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암으로, 위암, 대장암 등 상피 기원암과 다르게 생활 습관이 암의 발생을 예방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건 내가 오빠의 암에 대해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에 문제가 생겼을 땐 머리로만 현상을 이해하긴 힘들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 음식과 배달 음식을 자주 먹는 오빠의 식습관이 늘 못마땅했고, 함께 식사할 때라도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어설픈 영양학 지식을 쥐어짜 내어 야채 몇 점이라도 더 먹고자 하는 것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 특히 집밥을 먹는 것은 8할이 나의 의지였기 때문에 대부분 메뉴 제안과 요리는 내가 했다.
이렇게 말하면 퇴근 후 내가 대단한 요리를 했을 것 같지만, 내가 했던 요리들은 ‘요리’라고 부르기도 멋쩍은 것들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대부분 저녁 8시가 넘었기에 정성이 필요한 레시피보다는 빠르게 볶거나 삶아 후다닥 먹을 수 있는 볶음밥이나 파스타를 했고 그마저도 굴소스와 치킨 스톡의 힘을 빌렸다. 대신 버섯이든, 브로콜리든, 양파든 냉장고에는 야채 한 종류라도 꼭 구비해 놓고 요리에 많이 넣으려고 노력했다. 동작이 굼뜬 내 특성상, 들이는 시간에 비해 음식 맛은 늘 부족했지만, 간혹 맛의 균형이 제법 맞아 기분 좋게 배부른 채로 수저를 내려놓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볶음밥과 파스타의 변주에도 결국 한계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더 어렵고,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는 요리를 하겠다는 야망을 가졌다. 나는 가지와 감자를 깍두기처럼 한입에 알맞은 크기로 썰고 기름에 튀겨 지삼선을 만들기도 했으며, 인터넷에서 ‘수란 만드는 법’을 검색해 누르스름하게 잘 익은 아보카도, 냉동 명란젓과 함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나 볼 법한 아보카도 명란 비빔밥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내가 만든 수란은 사진과 다르게 쭈글쭈글 볼품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기 한두 시간 전 비 오는 날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김치전이 먹고 싶었다. 나는 오빠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김치전 어때?’ 오빠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난 김치전 별론데.’
뒤돌아 생각해 보면 대수롭지 않은 답변이지만 당시엔 그 카톡을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사실 온종일 회사에서 사람과 일에 치이다 8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해 요리를 시작한다는 건 몹시 지치는 일이었다. ‘오빠는 늘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니까, 한 끼는 사 먹는 내가 저녁에 요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또 오빠는 저녁을 대충 먹게 될 거야.’라는 생각에 저녁 당번을 자원하는 나였지만, 요리라는 행위 자체가 즐겁진 않았기 때문에 메뉴를 제안하는 것조차 무거운 의무로 느껴지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오빠의 반응은 대체로 미적지근했고, '먹고 싶은 거 있어?'라는 물음에는 '글쎄.'라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물론, 저녁 당번의 의무는 온전히 내가 스스로 떠안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심 오빠가 내 의도와 정성을 알아주기를 바랬다. 나는 오빠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오빠가 매번 밥 챙겨 먹기도 귀찮을 것 같고, 오빠 건강 생각해서 회사 끝나고 힘들어도 집밥 만들어 먹으려고 하는 건데 매번 뭘 먹을지 나만 고민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
오빠는 잠시 후 ‘김치전 먹자 내가 할게’라는 답장을 보냈다. 기분이 상했던 나는 됐다고 했지만, 집에 가보니 오빠는 이미 마트에서 돼지고기까지 사 와 김치와 잘게 간 돼지고기를 넣고 전 반죽을 만들고 있었다. 고춧가루 때문에 옅은 선홍색으로 변한 반죽을 프라이팬에 부으니 치이익 소리가 났고 잠시 후 기분 좋게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맛은 냄새만큼이나 훌륭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전 가장자리는 바삭했고 김칫국물을 반죽에 같이 넣었는지 밀가루 부분도 간이 잘 배어있었다. 자주 요리를 하진 않았지만, 10년 이상 자취한 경력 때문인지 오빠는 나보다 훨씬 더 요리를 잘했다. 오빠의 자취 내공은 특히 찌개류에서 드러났다. 가끔 오빠가 해주는, 양파를 가득 썰어 넣은 김치찌개는 적당히 달큰하고 칼칼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흰 쌀밥에 오빠가 만든 김치찌개만 있으면 다른 어떤 음식보다 맛있고 배부르게 식사할 수 있었고,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매콤한 국물로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었다.
그날 같이 고소한 김치전을 먹으며 오빠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화났었는지, 굳이 더 말을 보태어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실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오빠가 나에게 해 준 김치전 자체가 오빠 마음의 표현이었고, 함께 김치전을 먹고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하며 나도 암묵적으로 오빠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남매의 다툼은 늘 그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못하지만,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상대방은 짐짓 모르는 척 이를 받아들인다. 약간 남은 어색한 기운은 농담이 섞인 서로에 대한 ‘폄하’로 눈 녹듯이 사라지고, 우리는 언제 다투었냐는 듯 일상의 남매로 되돌아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오빠와 함께 ‘잘’ 살기 위해 양보하거나 조금 더 노력했던 것만큼, 오빠도 나와 더불어 살기 위해 포기하거나 인내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주워도 주워도 떨어지는 내 긴 머리카락이 성가셨을 것이고, 화장실에 화장품만 잔뜩 늘어놓고 청소는 하지 않는 내가 짜증 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빠는 한 번도 내게 안 쓰는 제품은 갖다 버리라고 역정을 낸 적도 없고, 네 머리카락은 네가 주우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없다. (나에게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퓨리오사처럼 머리를 다 밀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은 몇 번 했지만.) 동거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따로 명시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 오랫동안 한 지붕 아래 산 이력과 애정을 바탕으로 서로를 느슨하게 배려했고 둘 다 성인이 되어 ‘함께 사는 법’을 다시 배웠다. 사소한 생활 습관의 차이에 불쑥 짜증이 일더라도, 선선한 여름밤 함께 일산 호수공원을 걸으며 가족이기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솔직한 생각들을 도란도란 나누는 순간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따로 살아 다툴 일도 거의 없는 지금, 다시 오빠와 살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아마 별것도 아닌 이유로 또다시 티격태격할 것이고 가끔은 크게 싸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화해할 것이다. 밥상을 마주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