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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영 Aug 03. 2020

직장인의 무기력을 생각하다

모든 직장인을 대표하듯 거창하게 제목을 썼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나는 요즘 자주 무기력하다. 그리고 그 근원의 지분 90%는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이직한 지 곧 1년째, 더 이상 ‘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푸른 목초지를 찾지 않기로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 나에게 회사 생활과 그곳에서 하는 ‘일’이 나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비 오는 여름날, 몸에 습기가 조금씩 머금어져 결국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듯 무겁고 축축해지는 것처럼 직장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나의 평범한 일상과 심리에도 조금씩 스며들어 어디로든 도망가버리고 싶은 상태, 혹은 수동적인 반항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박경숙 박사는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에서 무기력의 원인으로 ‘통제 불가능성’을 지목한다. 인지과학 박사인 그녀가 인용한 심리 실험 중 하나는 마틴 셀리그만이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셀리그만은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첫째 집단은 해먹 안에서 전기 충격을 받지만 코를 판자로 누르면 전기 충격이 멈출 수 있도록 했고, 둘째 집단은 첫째 집단과 같은 충격을 받지만 개 스스로 충격을 멈출 수 없게 했으며, 셋째 집단은 충격을 일절 받지 않게 했다. 실험을 하고 24시간이 지난 후엔 개를 하나의 칸막이를 통해 두 공간으로 나눠진 셔틀 박스(Shuttle Box) 안에 넣고, 전기 충격을 주기 전 개에게 불빛이 어두워지는 신호를 주어 신호 10초 내 개가 칸막이를 뛰어넘어 반대쪽 공간으로 가면 개에게 충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첫째, 셋째 집단은 한 번 신호를 학습한 후엔 정상적으로 칸막이를 뛰어넘었지만, 처음 실험에서 개 스스로 충격을 멈출 수 없었던 둘째 집단만이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기력이 ‘학습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Rose M. Spielman, PhD - Psychology: Open Stax, p. 519, Fig 14.22 / CC BY 4.0


사람이 무기력을 배우게 되는 것은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 자극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중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지기 마련이지만, 무기력을 야기하는 ‘통제 불가능성’은 예상치 못한 문제와는 다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윗선에서 타사의 성공 사례를 들며 A라는 프로젝트를 지시한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의 목적과 가용할 수 있는 예산 등은 이사 후 한 번도 닦지 않은 화장실 거울처럼 뿌옇고 모호하다. 명확한 것은 빠듯한 ‘일정’과 상부가 ‘하라고 했다더라’는 하달식 명령뿐이다. 실무자(슬프게도, 이 상황에서는 나다)는 어쨌든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저곳 협력 업체와 유관 부서를 찔러보고 프로젝트 진행 계획과 내용을 정리한다. 그러나, 팀 내 프로젝트에 대한 공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중간 관리자도 해당 프로젝트에 대해 정리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삽질은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실무자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열심히 준비해도 임원의 변덕으로 프로젝트는 언제나 손바닥 뒤집히듯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결정이 뒤집히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누군가의 개인적 욕심이나 성과에 대한 ‘욕구’만으로 똘똘 뭉쳐져 던져지듯 주어진 프로젝트가 잘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문단만 보아도 나의 바닥으로 떨어진 사기가 느껴져 부끄럽다.)


결국 내가 열심히 하거나 잘하는 것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통제 불가능의 상황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면 ‘업무를 잘 해내고 싶다’는 진심 어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어떻게든 하루를 버티는, 회사원이라면 익숙한 ‘존버’의 날들이 찾아온다. 박경숙 박사가 말하듯, 이런 날들은 ‘살아가는’ 날들이 아니라 ‘살아내는’ 날들이다. 영혼은 집에 고이 모셔두고 회사에 출근해서는 뿌연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책임감으로 ‘쳐낸다.’ 점심시간엔 팀원들과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하는 정치인들처럼 침을 튀겨 가며 회사를 가열하게 비판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회사는 ‘돈 벌려고 다니는’ 거라며 짐짓 세상사 모두 통달한 척 말하지만, 이런 무력감과 수동적 반항의 상태는 어느새 집에 꿀단지처럼 숨겨두었던 나의 영혼까지 잠식하며 마음에 곰팡이를 피운다.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유로 퇴사를 결심할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을 해소하고 삶에 대한 주도성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퇴사 짤방’으로 유명한 밈(meme)처럼 퇴사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은 실제 퇴사자들의 경험담을 들어보았을 때 위험하다. 특히 팬데믹으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 퇴사 후 경제 활동에 대한 계획 없이 무작정 퇴사하게 되면 ‘세상’이라는 회사보다 더 큰 공간을 대상으로 한 통제 불가능성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


퇴사 후 한 달 간은 이 짤이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랜 B 없는 퇴사는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박경숙 박사는 일단 무기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박사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예로 들며 낙관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최고위 장교로 베트남 포로수용소에 8년간 갇혀 있던 짐 스톡데일(Jim Stockdale) 장군이 전쟁 후 본인을 인터뷰하던 기자에게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였다’고 답한 일화를 본떠 명명된 이론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희망하며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희망 사항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오히려 더 크게 상심해 무기력해진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비관이 훌륭한 대안책은 아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사고하되,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무기력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자세이다.


실제로 나도 ‘조급함’ 때문에 더 무기력을 느꼈던 것 같다. ‘아, 빨리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키워서 퇴사하고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야 될 텐데.’ 나와 비슷한 나이에 주관적으로 삶과 일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거나 당장이라도 재직 중인 회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고, 내가 걸어왔던 삶의 선택지가 잘못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좀 편해졌던 건, ‘자립의 길은 고통일 수밖에 없고 이 고통을 통해서만이 내가 성장한다’는 생각을 한 이후였다. 빠르고 쉽게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 ‘살아내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되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달팽이가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기어가듯 한없이 느리고 고통스러워도 한 발 한 발 이 전보다 더 나아가고 성장하는 삶을 목표로 살기를 다짐한 것이다. 고통을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나니 역설적으로 고통을 견딜 수 있었고, ‘빠른 성취’가 목표가 아니다 보니 다시 나의 삶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거나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 뛰어남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 그것이 내가 다시 설정한 삶의 목표이고, 이를 생각하면 회색 지대나 중간적 공간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그러한 공간에서도 노력할 동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회사에서, 그리고 퇴근 후 여전히 무기력으로 고통받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와 내 인생이 머물러 있는 완성품이 아니라 언제나, 늘, 죽을 때까지 진행 중(Work in Progress)이며 모든 순간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분명히 직시한 채 느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자립하는 삶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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