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먹고, 추억을 껴안으며

by 주연

어수선한 머릿속에서는 '추억은 추억일 뿐이에요. 추억은 아무런 힘도 없어요'라는 지나간 드라마의 대사만 맴돌 뿐, 추억이라는 단어를 며칠째 입으로 곱씹어 보아도 특별하다 여겨지는 일이 없다. 지난 몇 년간 나의 행적이 기록된 sns와 드라이브를 뒤적였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당시에는 버겁게만 느껴지던 날들에도 작은 기쁨들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함께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가족사진. 남아있는 옛 사진이 거의 없다 보니, 무척이나 소중한 그 사진 속에 우리 네 사람은 꿈돌이 종합백화점 앞에 나란히 서있다.




내가 7살 되던 해, 대전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과학 엑스포가 열렸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연일 엑스포에 대한 광고가 나왔고, 주말이 끝나면 꿈돌이 동산에 다녀왔다며 으스대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과학도 꿈돌이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우리를 대전 엑스포에 꼭 데려가고 싶어 했다. 크는 동안 공부하라는 말은 한 번도 안 했지만, 인근 중소 도시에서 무슨무슨 박람회가 열린다고 하면 옷장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시외버스를 태워 당시 시골에선 접하기 어려웠던 '박람회'라는 것에 꼭 데려가 주던 사람. 그런 엄마로선 대전 엑스포는 모른 척 넘기기에는 너무 큰 행사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대전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다. 대전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새벽 첫차를 타고 대구로 가야 했다. 대구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터미널에서는 택시를 타고 유성으로 들어갔다. 7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멀리까지 나온 나들이었다. 시골에서 논과 밭을 뛰어다니며 놀던 우리 삼 남매에게 대전은 무척이나 크고 생경한 도시였다. 우리는 들뜬 마음에 긴 여정이 힘든 줄도 몰랐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엑스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는 오늘 하루는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니 꼭 재밌게 놀고 가자고, 대신 손은 절대로 놓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하며 밝게 웃었다.


예보에 없던 비가 내려 우리는 커다란 옥색 비옷을 사 입어야 했다. 비옷은 그냥 입기엔 워낙 길어서 무릎께에서 크게 매듭을 묶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옥색 항아리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옥색 항아리를 입고,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코카콜라를 하나씩 든 조금 우스운 모습으로 꿈돌이 종합백화점 앞에 섰다. 엄마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사진을 부탁했다. 4살, 7살, 9살의 우리 삼 남매와 36살의 경희 씨가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실 꿈돌이 동산이나 엑스포에서 뭘 했고, 뭘 봤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와 나는 두고두고 그날 이야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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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가장 밝고, 가장 아는 게 많고, 가장 친절했다. 엄마는 아빠나 다른 가족들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우리를 부족함 없이 키우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덕분에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외롭거나 가족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그다지 받지 않았었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아이 셋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작고 여린 몸으로 세 아이를 키우며 폭력으로 점철된 매일을 견뎌낸 엄마는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생겼을까 생각하면 어쩐지 자꾸만 눈 앞이 흐려진다. 지금의 나는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보다 3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제대로 하는 것도 별로 없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이리 힘이 드는데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해 봄부터 작년 겨울까지, 나는 5년 동안 도시락 가게를 운영했었다. 장례가 끝난 뒤, 엄마의 55년 인생을 모두 정리하고 나니 우리 3남매에게는 천만 원이라는 돈이 남았다. 거기에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100만 원을 더해 소자본 창업을 했다. 장사를 하는 동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엄마가 준 소중한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치열하게 버텼다. 그래서인지 고민 끝에 일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고 폐업 수순을 밟으면서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간판을 떼어내기 전 날도 작업실 앞에서 울다 웃다 난리를 치며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그 날 찍었던 사진을 sns에 올리며 '지나고 보면 그저 다 아름다웠다는 걸-'이라는 문구를 적었었다.


장사를 하는 동안에는 버겁게만 느껴지던 일들도 지나고 나니 한결 여유롭게 웃어볼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좋은 추억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나 지금의 내 생활들도 사실은 매일매일이 반짝이는 추억의 연속일 것이다. 엄마를 떠올리면 저절로 생각나는 고블렛 잔이 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그 고블렛은 엄마가 가장 아끼는 살림살이 중 하나였다. 파도가 들이치면 알알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어올라 반짝이는 빛처럼, 영롱함이 알알이 붙은 듯한 바다색의 고블렛을 엄마는 매일 정성스레 닦았다. 엄마와의 추억도 내 마음속에서는 영롱한 알갱이가 되어 알알이 반짝이고 있다. *어떤 추억은 붕붕거리고, 또 어떤 추억은 가만히 내려앉아있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억을 먹고, 추억을 껴안으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반짝임을 매일 조금씩 더해 가고 있다.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