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을 2주 앞두고 엄마가 죽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 이어지던 26살의 가을, 당시 레스토랑의 요리사로 일하던 나는 근무시간 동안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의 영업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다음날 필요한 식자재의 목록을 작성해 유통업체에 팩스를 보내려던 찰나, 가게의 전화가 울렸다.
내 곁의 동료직원이 전화를 받았고, 잠시 후 그는 수화기를 나에게 건넸다.
"혜지 씨 찾는 전환 데요? 받아보세요"
"네? 저요? 누군데요?"
가게 전화로 나를 찾을만한 사람이 없는데 생각했지만 곧바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라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의 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왜 이렇게 핸드폰 확인을 안 하냐고, 하다 하다 안 받아서 가게로 전화한 거라며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언니는 엄마가 죽었다고 했다. 엄마가 죽어서 우리가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엄마가 갑자기 왜 죽냐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나는 그 말이 바로 와 닿지가 않아서, 갑자기 사고 회로가 정지된 사람처럼 잠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왔다. 팩스 번호를 누르기가 어려웠다.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19통. 나는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요리를 한답시고 이렇게나 전화에 불이 나는 동안 한 번도 확인을 안 했을까. 나는 허무하게 핸드폰을 바라보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테이블 냉장고에 상체를 숙여 몸을 기댔다. 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 손에는 팩스 종이, 다른 한 손에는 망할 핸드폰을 꼭 쥔 채 나는 얼굴을 파묻고 쪼그려 앉아 울었다.
수분이 흘렀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고,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들이 택시를 불러줬다. 근무를 하던 서초동에서 상도동으로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 나는 빠르게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당시 쪼꼬가 진료를 받던 동물병원은 24시간 운영하던 곳이 아니라서 맡길 다른 곳을 급히 찾아야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동물병원에 사정을 말했고, 원장님은 내가 도착할 때까지 병원에서 기다려 주시기로 마음을 써주셨다. 상도동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간단히 꾸린 내 가방과 쪼꼬, 쪼꼬의 사료를 들쳐 매고 동물병원까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10월이었지만 내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이었다. 그때의 나는 빠져나간 정신을 억지로 억지로 간신히 동여맨 사람의 꼴이었다. 원장님은 쪼꼬 걱정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오시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고, 나는 급히 감사인사만 남긴 채 지체할 틈 없이 병원에서 나와 곧장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상도동에서 마천동까지 택시가 달리는 동안 나는 두 손으로 감싸 쥔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내 모습을 본 기사님이 '아가씨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엄마가 죽었어요'라고 대답하며 눈물을 쏟아내었다. 분수처럼 터져버린 울음은 쉬이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마천동에 도착해 형부의 차를 타고 밤안개가 짙게 내린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개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 요동치는 각자의 심장소리만이, 간간이 내뱉는 깊은 한숨만이 차갑게 얼어붙은 공간을 간신히 메울 뿐이었다.
엄마는 혼자 죽었다. 매일 엄마와 만나던 친구분은 그날따라 하루 종일 소식이 없던 엄마가 걱정되어 퇴근 후 집으로 찾아갔고, 현관문 앞에서 느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119 신고를 하셨다고 한다. 베란다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간 구조대가 혼자 침대에 누워있던 차가워진 엄마를 발견했다. 저녁 7시, 하얀 천에 덮인 엄마의 시신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모이는 동안 영안실에 혼자 누워있어야 했다. 새벽 1시, 언니와 내가 도착했지만 당시 복무 중이던 남동생이 상주 역할을 해야 하니 상주가 오기 전까지는 곧바로 입관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영정사진이 필요했다. 미리 찍어둔 사진이 없으니, 엄마 집에 가서 사진을 찾아와야 했다. 동생은 아직 도착 전이고, 언니는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나 혼자서 엄마 집, 엄마가 혼자 죽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어질러진 이불들과 형언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공기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나는 얼른 티브이 위에 놓여있던 엄마의 증명사진을 집어 들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 엄마가 잠이 들고 눈을 뜨던 침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그 침대가 내 눈 앞에 있다. 엄마가 이사할 때 내가 사준 28만 원짜리 침대가 덩그러니 내 눈 앞에 있다. 엄마가 정말로 죽은 것이다.
다음날 동생은 화천에서 동서울, 대구를 거쳐 창녕으로 왔다.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입관을 할 수 있었다. 입관을 끝내자 곧바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마지막을 애도하기 위해 다녀갔다. 목놓아 울고, 먼저 간 엄마를 원망하고, 남겨진 우리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게, 혼자 침대에서 죽어가던 엄마가 조금의 서운함도 갖지 않고 떠날 수 있게 영정사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사이 향이 꺼지지 않게 신경 썼다.
하룻밤의 짧은 장례식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화장터로 갔다. 화장터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누가 들어도 슬프고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불교식 경 비슷한 걸 틀어줬다. 이모들은 그 방송을 들으며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었다. 나도 이제는 더 흘릴 눈물이 없을 것처럼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내 안에 남아있던 깊은 울음은 토해내지 못했다. 어쩐지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한 시간여를 달려 화장터에 도착했고 몇 가지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치자 엄마의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갔다.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산 중턱의 화장터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끝이 없을 듯 아득하게 굽이 진 능선들, 제멋대로 흩날리는 검은 치맛자락과 잔머리 같은 것이 나를 몹시도 뒤흔들었다. 그래도 나는 소리를 내어 울지 못했다.
엄마의 작은 몸은 보통 성인들의 화장시간에 비해 절반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만에 재가 되어 내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하얀 보자기에 싸인 엄마를 조심히 안아 들고 천천히 걸었다. 까끌한 자갈 바닥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납골당에 분골함을 안치하고 곧바로 탈상을 했다. 나는 추모원의 화장실에서 장례식 동안 입었던 검은 상복을 벗고 하얀 머리핀을 빼내었다. 뜨겁게 부어오른 얼굴을 차가운 물로 씻어내었다. 거울 속 부은 눈두덩이가 서글펐지만, 갑자기 나는 엄마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주민센터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고, 엄마의 핸드폰 계약을 정리했다.
다시 엄마의 집으로 갔다. 엄마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살림들과 옷가지, 엄마의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간 엄마 집에는 나의 대학 졸업앨범과 언니의 초등학교 시절 시화액자도 있었고, 서울에 처음 와서 산 빨간 접이식 자전거도, 내가 스무 살 때 치던 통기타도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에는 정갈하게 잘라 말린 감이 소쿠리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는데 엄마만 없었다. 엄마는 이제 정말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집안을 정리하던 중 아래층에 사시던 이웃분이 땅콩죽을 끓여 가져다주셨다. 엄마가 없는 엄마 집에 모여 앉은 우리는 속이 없게도 따뜻하고 맛이 좋은 땅콩죽을 호호 불며 한 그릇씩 나눠 먹었다.
엄마의 집 정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동생은 부대로 돌아갔고, 언니는 돌이 채 지나지 않은 갓난쟁이 조카와 형부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상도동의 반지하방으로 돌아왔다. 보일러를 세게 틀고 라벤다색 이불을 덮고 바닥에 누웠다. 절절 끓는 바닥에 몸이 녹아내렸다. 이대로 잠이 들면 어쩐지 나도 다시 눈을 뜨지 않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즈음 잠에 들 수 있었다. 어쩐지 점점 더 깊은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지만 나는 다음날 오후까지도 꼼짝 않고 라벤다색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엄마가 죽었다. 나는 그렇게 고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