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에 켜켜이

by 주연

냉장고 깊숙이 숨어있던 유자청에 자연스레 손길이 가는 계절이 되면 수저 가득 떠낸 유자청에 뜨거운 물을 부어 휘저으며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유자차.


6년 전 우리는 엄마의 유언 아닌 유언대로 엄마를 땅에 묻지 않고 화장했다. 엄마는 흘러가는 말로 땅에 묻히는 것이 싫다고 했었다. 찾아오기도 어려울 테고, 어쩐지 땅에 묻히는 것은 겁이 난다는 게 이유였다. 다행인지 우연인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두해 전쯤 고향에는 군공설 장례식장이 만들어졌다.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했던 엄마는 그곳의 안치실에서 도시로 나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레 화장을 하고, 장례식장과 함께 운영 중인 추모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서너 번 정도 추모원에 다녀오는 편이다. 공식적으로 가는 날은 엄마의 기일과 생일이다. 엄마의 기일은 10월, 생일은 3월이라 가을과 봄에 추모원에 다녀온다. 나머지는 마음이 많이 힘들어져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지면 즉흥적으로 다녀오는 경우이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반을 달리면 엄마가 있는 고향의 터미널에 도착한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하루짜리 여행에는 자다 깨다 읽을 수 있는 시집 한 권과 이어폰을 가방에 챙기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깨끗하고 예쁜 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곤 남부터미널로 가서 고향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탄다. 첫 버스라고 하지만 하루에 5대가 전부인 완행버스라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다.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두 시간 여 달리면 중간에 휴게소에 한번 들른다. 휴게소에서는 꼭 호두과자를 사서 챙긴다. 따끈한 호두과자는 받자마자 반 정도를 먹고, 나머지는 종이봉투를 잘 여며 가방에 챙겨 넣는다. 그리고 또 자다 깨다 두 시간 여를 다시 달리면 고향의 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추모원으로 간다. 추모원의 2층 3번째 코너, 1934번 자리에 엄마가 있다. 나는 챙겨간 호두과자와 캔커피를 꺼내 엄마의 사진 앞에 내려놓고 한참을 앉아있는다. 사진을 멍하니 보다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는데 평일 한낮의 추모원은 다녀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나는 많은 떠나간 사람들에 둘러싸여 어린아이처럼 편히 울 수 있다. 그렇게 추모원에서 한 시간 정도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택시로 갔던 길을 걸어서 돌아 나온다.


엄마가 좋아했던 호두과자와 캔커피
언니의 딸 지수가 엄마엄마(외할머니)에게 쓴 글


추모원에서 터미널로 돌아가는 길에는 엄마와 함께 갔던 저수지가 있는데, 가장자리에는 늘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나는 엄마를 보러 갈 때마다 서울에서는 아직인 봄이나 가을을 조금 더 일찍 느낄 수 있는 것이 즐겁기도, 굳이 누리지 않아도 될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다. 어릴 때는 아득하게 커 보이기만 하던 그 저수지도 이제는 그저 시골의 작고 흔한 농업용 저수지로 보였다.



인도가 없는 길을,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 대로변이 나오는데 대로의 맡은 편에는 엄마와 함께 7년을 살았던 아파트가 아직도 그대로이다. 내 불안하고 지리멸렬했던 유년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그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들이고, 그래서 아파트를 똑바로 보는 것이 매우 괴로우면서도 어쩐지 나도 모르게 눈으로 둘넷여섯.. 하며 우리가 살던 7층을 세어보곤다. 지금 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며 잠깐 그 집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곤 엄마와 언니와 내가 졸업한 여중학교를 지나 막국수집으로 간다. 외식거리가 별로 없는 시골에서 막국수집은 입소문을 타고 이제는 외지인들까지 찾아오는 지역의 맛집이 되었다. 나도 일 년에 두어 번은 그 달큰하고 짭조름한 맛이 간절해지는데, 그러다 보니 시골에 다녀올 때는 꼭 들러서 한 그릇 사 먹게 되었다. 엄마와도 자주 가던 곳이고, 엄마와 함께 했던 마지막 외식이기도 해서인지 실제로는 지역특산물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막국수가 어쩐지 나에게는 고향의 맛처럼 남게 되었다. 그렇게 막국수를 후루룩 먹고 터미널까지 걸어가면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시골의 작은 터미널은 너무 소박하고도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있어,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괜스레 마음이 더 헛헛해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챙겨간 시집을 꺼내 읽었던 구절을 다시 읽거나 엄마가 좋아했던 이문세, 조성모 등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그리고 이 노래, 유자차를 들었다. 가만히 가만히 가사를 들여다보면 어쩐지 마음이 따끈해졌다. 뜨거운 유자차를 호호 불어 조심히 후릅거리며 목구멍으로 넘기는 기분이 드는 노래였다.


어린 시절의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 사실 추억들마다 그 뒤편의 일들이 함께 떠올라 마음이 조금 착잡해지곤 한다. 가령, 어린이날 엄마아빠는 따로 볼 일이 있어 엄마 친구라는 어떤 아줌마가 우리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 아줌마는 엄마 친구가 아니라 그 당시 아빠의 내연녀였다. 엄마가 아빠 없이 우리만 데리고 무주의 눈썰매장이나 인근 지역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데리고 다닌 것도 사실은 가정과 아이들에게 책임감이 전혀 없었던 아빠의 무관심을 덜 느끼도록 애쓴 엄마의 노력이었다. 일부러 더 정성이 가득 들어찬 도시락을 챙겨주거나, 생일날이 되면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김밥과 양념통닭을 나눠먹게 해 준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엄마는 밀양의 지방법원에 가서 이혼을 했다. 재판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어져 우리는 법원 앞의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엄마는 동생과 내게 뜨겁고 달콤한 탕수육과 짜장면을 사 먹였다. 우리는 탕수육이 맛있다고 웃어 보였지만 엄마는 '마이 무라~' 하 웃으면서 울었었다.


어디에든 설탕 뿌리기를 좋아했던 엄마 덕분에 우리는 늘 설탕이 뿌려진 토마토나 수박을 먹었었다. 가래떡이나 절편도 꼭 설탕을 찍어 먹었고, 엄마가 만들어 주던 반찬 중에는 넉넉히 넣은 간장과 설탕에 달큼하게 졸여낸 양파 조림을 가장 좋아했었다. 위압적이고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에서도 우리가 밝고, 웃음이 많고, 이 정도의 긍정적인 어른으로 자란 데에는 엄마의 설탕 같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자차의 노랫말처럼 나도 엄마와의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내 마음에 켜켜이 잘 묻어두었다. 설탕이 다 녹으면 맛볼 수 있는 유자차처럼 우리의 기억도 나쁜 것들은 시간의 힘에 기대 스르르 다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얼어붙은 겨울 같은 시간도 결국에는 끝이 나고 비로소 달고 진한 것들만 남은 봄날로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엄마와 내가 봄날에서 만나 따뜻한 유자차를 함께 나눠 마실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뜨거운 유자차를 홀짝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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