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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31. 2018

빨간 매니큐어

                                                         


 도톰한 손 끝의 강렬한 빨간 매니큐어. 그녀는 언제나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발랐다. 빨간색을 유독 좋아했던 그녀는 딸아이가 4학년이 되던 해의 설빔으로 위아래가 세트인 빨간색 투피스를 사 입혔고,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날 아침에는 서랍에서 빨간색 카라티를 주섬주섬 꺼내 주었다. 앨범 속 옛 사진에는 빨간 한복을 입고 수줍게 눈을 내린 올림머리의 새색시가, 빨간색 수영복을 입힌 통통한 아가를 안고 말갛게 웃는 젊은 그녀가 있었다.
 
 겉보기에는 언제나 밝고 힘이 넘치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는 자주, 또 많이 흘러내렸다. 소란한 밤이 지나고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한 어스름한 새벽이 오면 그녀는 마치 거품처럼 녹아 하수구로 흘러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아침이 되면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진 그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나물을 무쳐내고,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바짝 당겨 묶어주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쓸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나던 그녀의 살림들과는 달리 그녀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어느 주말이었다. 밤을 하얗게 새우며 또 무참히 구겨지고 짓밟힌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이대로 살자니 도저히 살 수가 없고, 다 놓아버리자니 새끼들이 눈에 밟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숨이 막혀왔다. 그때, 이따금씩 작은아이의 손을 잡고 다녀오던 작은 저수지가 베란다 난간 너머로 일렁였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그곳을 벗어나야만 끝을 알 수 없는 이 모든 괴로움들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울면서 달라붙는 새끼들을 간신히 뿌리치며 매니큐어 칠이 벗겨진 앙상한 손을 난간에 올렸다.


내가 죽으면 이 생때같은 것들을 어찌할까,
이것들을 모두 껴안고 다 같이 죽어버려야 할까.

온몸을 휘감아 뒤흔드는 무서운 생각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무거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지독한 울음이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었다.
 
 새하얀 타일 바닥에 투둑. 빨간 방울들이 점을 찍었다. 708호와 707호 사이 복도에도, 도착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던 엘리베이터에도 빨간 방울들이 선명한 점을 찍었다. 첫째가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은 그녀를 둘러업었고, 셋째가 뒤따라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둘째 아이는 눈물과 공포로 범벅이 된 얼굴을 연신 소매로 훔쳐내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끅끅거렸다. 온몸이 들썩였지만 발은 얼어붙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상황이 끝난 뒤에는 검은 적막과 망가진 살림들만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는 번뜩 정신이 들어 걸레질을 시작했다. 얼른 그것들을 지워내고, 이 모든 상황을 지워내고, 그냥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 선명한 빨강들을 뜨거운 눈물로 닦아내고 희석시켰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눈에는 초록의 이끼가 밤안개처럼 내려앉았다. 부옇게 흐려진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나의 알량한 꿈이나 미래 따위가 다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고, 그녀를 두고는 어디에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나로선 가까스로 몇 달에 한번 짧은 휴가를 내어 그녀를 만나러 가면 좋아하는 빨간 매니큐어를 반듯하게 칠해주고, 장미가 흐드러진 공원길을 함께 걷는 것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에 올 때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있을 테니 함께 단풍을 보러 가자고 파삭해진 그녀의 손을 비비며 약속했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위 하얀 수의를 입은 그녀가 반듯이 누워있다. 지난밤 심장에 꽝하고 첫 번째 번개가 내려쳤을 때 그녀의 눈은 꿈을 좇아 떠나간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홀로 천장을 더듬었을 것이다. 찌릿하고 서슬 퍼런 섬광 같은 것이 다시 한번 들이쳤을 때는 별 것 아닌 일에도 말갛게 웃던 꿈 많은 고운 아가씨가, 하얀 신사정장을 즐겨 입던 훤칠한 친정아버지가, 복수가 가득 차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하고도 둘째 동생만 보면 허허 웃어주던 먼저 간 큰오빠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얼굴들을 뒤로하고 이제 그녀가 반듯이 누워있다. 그녀의 발에는 색색의 꽃이 수놓아진 하얀 버선이 신겨졌다. 입술에는 빨간 루주를 곱게 발랐다. 매캐한 소독약 냄새에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언니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나는 또 발이 얼어붙었지만 그녀를 보고 또 보며 그녀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 많이 불던 언덕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작아진 몸을 하얗게 태우고 날아갔다. 나는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나부끼는 검은 치맛자락을 움켜 잡으며 울음을 삼켰다. 훨훨 날아가서 아부지도 만나고, 큰오빠도 만나라고. 더 많이, 더 자주 사랑을 말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좀 더 일찍부터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에는 빨간 매니큐어 곱게 칠한 내 또래의 예쁜 아가씨였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빨간색의 플라스틱 장미로 테두리를 장식한 액자를 그녀의 이름 아래 걸어두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곧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 돌아온다. 그녀가 보고 싶은 밤에는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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